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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오후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4.

도종환 시인 / 오후반

 

 

너는 들어갈 교실이 없고

나는 돌아갈 학교가 없구나

하급반 아이들이 공부하는 창 밖에서

너는 가방을 풀지 못한 채

오후의 햇살을 발로 차며 서성이거나

차가운 골마루에 올망졸망 쪼그리고 앉아

빗소리와 선생님 말소리가 뒤섞이는 받아쓰기를 하는구나

사람들마다 일터를 찾아 바쁘게 달려나간

적막한 오후의 거리를 지나다 너희 학교를 바라본다

얼마나 더 지나야 너희의 꿈과 이야기가

알록달록 아름다운 저마다의 교실을 갖게 될까

얼마나 더 지나야 아이들과 싱그러운 아침인사를 나누며

나도 자랑스럽게 학교 문을 들어설 수 있게 될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창작과비평사, 1993

 

 


 

 

도종환 시인 / 옥천에 와서

 

 

영암산 골이 깊어 바람이 길다

시를 쓰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에 태어나

몇 편 시에 생애를 걸고 옮겨 딛는 걸음이 무겁다

새해엔 또 어디로 쫓기어 갈 것인가

아직 돌도 안 지난 아이를 노모께 맡기고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큰애가 문에 서서

빨리 다녀오라고 민들레처럼 손을 흔들 때

자주 오지 못하리란 말일랑 차마 못하고

손을 마주 흔들다 돌아서며

아내여, 당신을 생각했다

이 싸움은 죽어서도 끝날 수 없는 싸움임을 생각했다

세상을 옮겨 간 당신까지 다시 돌아와

아이들을 지켜 주어야 하는 싸움임을 생각했다

슬픔보다는 비장함이어야 한다

이 땅 어느 그늘 들풀 크는 곳이면 내 못 갈 곳 없지만

에미 잃고 애비와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들을

당신께라도 다시 보살펴달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음 이 미어짐을 당신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이 길을 가야 한다

봄이면 할미꽃 제비꽃 다시 피는 이 나라

죽음도 삶도 모두 한세상 이루어

우리도 무성히 되살아나며 이 길을 가야 한다.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6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