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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연숙 시인 / 내재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4.

송연숙 시인 / 내재율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발성연습을 해보았다

목소리에는 신을 키우는 메아리가 있고

노래 속에는 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래가 종이처럼 구겨지는 것을

귀는 몰래 듣고 있었다

 

양동이는 요란한 소리를 품고

가을 내내 새들을 쫓았다

양동이에서 찌그러진 음표들이 쏟아질 때마다

새들은 마을 끝까지 휘어졌다 제자리로 돌아오곤 하였고

양동이 속에는 여전히 새들이 남아 있었다

 

봉인된 동종(銅鐘) 속 아이는

뚝, 뚝, 그쳐라, 울음을 참고 있다

바닥까지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는 신(神)

신을 알아챈다는 건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견뎌야 하는 일인지

전설의 노래에는 푸른 녹이 번져 나가고

까마귀들은 저녁 하늘을 울며

종소리처럼 날아올랐다

 

내 안엔 내가 흐르는 운율이 있다

돌아눕다가 휘어지거나 꺾이는 꿈엔 내성이 생겼다

그 어느 지점을 더듬으며

성호를 긋고 발성연습을 한다

양동이에서 쏟아진 내 안의 새떼들

그림자 없는 신의 발자국처럼

어지럽게 날아오른다

 

시집 『측백나무 울타리』(시와표현, 2019) 중에서

 

 


 

 

송연숙 시인 / 달팽이, 시간을 굴리다

 

 

달팽이가 지나간 배춧잎은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문양은 느린 시간의 발자국, 무형의 무늬 속으로 늦여름이 빠져 나간다 사각사각 초침들이 배추 이파리를 지날 때 점액질 흰 달은 둥글게 살이 찐다 여름의 막바지들이 겹겹으로 들어차고 막바지에 다다른 파란을 달팽이가 갉아 먹는다 파란의 흉터는 공중의 숨구멍

 

모든 흉터는 파란이 파란(波瀾)을 겪으며 걸어온 흔적이다

 

달팽이가 지나온 흔적 너머로 늙은 개가 하품을 하고 밀잠자리들이 고춧대 끝에서 구름의 전파를 잡는다 알밤이 툭툭 가을을 세고 수수열매 자루들마다 공중을 쓸고 있다

 

지금은

배추들이 겉잎을 버리는 시간

풀벌레 소리가 배춧잎으로 스며드는 시간

햇살과 바람의 끝자락이 알곡처럼 자루에 담기는 시간

 

오른돌이바람이 천천히 공중의 시간을 돌리고 있다

 

시집 『측백나무 울타리』(시와표현, 2019) 중에서

 

 


 

송연숙 시인

2016년 월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상 당선. 시집으로 『측백나무 울타리』(시와표현, 2019)가 있음. 현재 『시와 표현』 편집장,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