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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철 시인 / 실업 Ⅱ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4.

박남철 시인 / 실업 Ⅱ

 

 

깨는 것이 괴로운 나날들,

고향 계신 어머님 생각하면 눈물난다

칠포에서 가져오신 작은 쥐치 한 마리를

먹으라고 주시던 아버님 생각도 난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실업, 글썽거리는 아내의 눈망울, 어린 아들의 울음에도

가슴이 미어지는 나날―

 

어머님, 어머님,

무릎 꿇고 고향 쪽을 보며 다시 대성통곡을 한다.

 

러시아집 패설, 청하, 1991

 

 


 

 

박남철 시인 / 심판

 

 

이제 나는 부자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다

이제 나는 안 나누어 주는 사람들에 대한 희망은 그 한 발 앞에 포기한다

이제 나는 많이 배운 사람들에 대한 희망 또한 포기하고

이제 나는 집이 더 좁아진 사람들에 대한 희망 역시 포기한다

 

이제 나는 이 지상(地上) 위에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포기한다 원망하지도 저주 역시 포기한다

 

이제 나는 내가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일임을 안다 개새끼들아아아 하고 울지도 않는다 울음 속에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나의 가난 속에서 풀무질되는 대망 이상의 대망을 꾸는 일밖에 없음을

그대들이여 또는 바로 나여 이 세상(世上)은 어쨌든 불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음을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아버지

 

 

1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아

 

아버지 돈 좀 주세요 머라꼬

돈 좀 주 니 집에 와서 슨 돈이 벌쎄 얼맨 줄 아나

8마넌 돈이다 8마넌 돈 돈 좋아요

저도 78년도부텀은 자립하겠음다

자립 니 좋을 대로 이젠 우리도

힘없다 없다 머 팔께 있어야제

자립 78년부텀 흥 니 좋을 대로

근데 아버님 당장 만 원은

필요한데요 아버님 78년도부터

 

당장 자립하그라

 

2

 

뭐요 니기미이 머 어째 애비 보고

니기미라꼬 니기미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야아 이

 

자알 배왔다 논

팔아 올레서 돈 들에 시긴

공부가 게우 그 모양이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예끼 이 천하에

 

소새끼 같은

 

아버지 천하에

소새끼 같은 아버지

고정하십시요 야아 이 놈아

 

아버지

 

3

 

어젯밤에도 또 아버지 꿈을 꾸었다 아버지는

찬물에 밥을 뚜욱뚝 말아 드시면서 시커멓고 야윈

잔기침을 쿨럭쿨럭 하시면서 마디마디 닳고 망가진

아버지도 젊었을 적에는 굉장한 난봉꾼이셨다는데

 

꿈속에 또 꿈을 꾸었는데 아 젊은 아버지와

양장을 한 어머니가 참 보기에 좋았다 젊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한창 애교를 떨고 있었고

아 참 보기에 좋았다 영화처럼 사이좋게

 

나는 전에 그런 광경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어머니

 

 

1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있었다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 우선 가슴부터 철렁했다

 

재홍이는…… 거기 갔드나……

 

웬일이세요, 이렇게 아침 일찍?

응…… 내가 니인테 머 부탁할 일이 하나 있아가……

동생은 첫휴가를 나왔었다 그가 귀대하는 날 아침

나는 3만 원을 주자는 아내에게 단호히 2만 원만 줘서 보내라 했다

 

아버지는 잘 계시고요? 응…… 인자 논에 나가셨다……

아버지는 대구 공사장에서 내려오신 거로 게군

우린 논을 다 팔았다 시골집은 저당 잡혀 있고

웬일이세요,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통화료 올라가요……

 

아버님이 아무 일 없으시다면 우선 걱정은 어머닌데

이렇게 전화를 하시는 걸 보니 무슨 갑작스러운 노릇은 아닌 듯하고

 

어머니와 나는 지지난 달에 똑같이 한양대 신경정신과엘

들렀다 나는 신경쇠약이고 어머니는 나 보다도 더 심하시다

조금만 움직이셔도 픽 쓰러지시고 가슴은 마구 둥당거리신단다

 

야야…… 내가 이거 자식한테 처음 하는 말인데……

 

어머니는 순간 목이 콱 막혀 오셨다 돈이 얼마쯤 필요해가……

나도 순간 목이 콱 막혀 왔다 어 얼마가 필요하세요, 어무이……

 

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한 9마넌, 아니, 아니, 딱 7마넌만 하모 되겠구나……

 

나는 더욱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의 가슴 두근거리는 소리가 마구 들려오는 듯했다

예에, 그걸 뭐 그렇게 어렵게 얘기하세요 아무 걱정 마세요 어무이……

 

지난번 소아마비의 누이동생이 결혼할 때도 나는 한푼의 부조도 못 했었다 나는 그 누이를 미워하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미워하고 있었다

 

그 누이는 그날 그 점촌의 예식장에서 90만 원의 현금과 라이카 카메라 한 대를 잃어 먹었었지 자기가 나온 전문대학의 교수님이 주례를 서실 동안 신부대기실에서는 그 돈과 물건이 증발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외제 카메라는 남에게서 빌려 왔던 것

 

그런데 어디다 쓰실 건데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좀 풀려왔다

응, 야야, 모심기를 할라카이 당최 현금이 있아야제…… 요새는 일손이 귀해가 논뚝에서 딱딱 돈 안 주모 일 안 해 준다……

 

그까짓 농사 지아가 뭐해요! 나는 아니 그는 갑자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성대 정치과엘 다니다 군대에 간―그는 장학생이었다―동생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판 논의 소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가집 돈 240만 원과 또 무슨 돈 170만 원 때문에 어머니는 거의 매일 울고 계셨고

 

야야…… 아무리 그래도 농사꾼이 농사짓다가 농사 안지으모……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시 감기기 시작하셨다

 

나는 다시 눈시울이 뜨끔하여 예, 예, 알았어요, 알았어요, 오늘 당장 보내 드릴께요, 통화료 올라가이 빨리 끊으세요,어무이 건강 조심하시소……

 

오야…… 내 걱정은 마래이……

 

니 몸조심하고 어쩌고 하고 계속되는 걸 나는 수화기를 딸칵 놓아 버렸다

 

내 울화가 치미는, 흐느껴지는 목소리를 어머니가 너무 오래 들으셔서는 안 되니까

 

어느 틈에 아내가 깨었던지 눈물이 흐르는 내 눈을 둥그렇게 쳐다보다가, 남산만한 배를 들먹거리며 팔뚝을 마구 함부로 쳐들며, 10만 원 보내자, 10만 원…… 하며……

 

2

 

지난번 선거에서 아버지는 민정당의 박×석씨를 어머니는 서×열씨를 그리고 동생들 셋은 모두 최×환씨를─최×환씨는 성대 출신이다─찍었다 한다

 

그러면 이 잠실의 강동구에서 나와 나의 정부(情婦)인 나의 아내는 과연 그 누구를 찍었었던가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죽어도 의회주의자니까──

 

반시대적 고찰, 한겨레, 1988

 

 


 

박남철(朴南喆) 시인

1953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9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시 〈연날리기〉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와 『반시대적 고찰』(한겨레, 1988 / 세계사, 1999) , 『러시아집 패설』(청하, 1991)와『자본에 살어리랏다』(창작과비평사, 1997), 『바다 속의 흰머리뫼』 (문학과지성사, 2005), 『제1분』(문학수첩, 2009)과 시선집 『생명의 노래』(문학세계사, 1992) 와 박덕규와의 공동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청하, 1982)와 박남철 비평시집  『용의 모습으로』 (청하, 199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