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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그리운 서귀포1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4.

노향림 시인 / 그리운 서귀포1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맑은 갯벌엔 눈감은 게 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 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 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노향림 시인 / 깊은 우물

 

 

그대 가슴에는

두레박줄을 아무리 풀어내려도

닿을 수 없는 미세한 슬픔이

시커먼 이무기처럼 묵어서 사는

밑바닥이 있다.

 

그 슬픔의 바닥에 들어간 적이 있다.

안 보이는 하늘이 후두둑 빗방울로 떨어지며

덫에 걸린 듯 퍼덕였다.

 

출렁이는 물 위로

누군가 시간의 등짝으로 떠서 맴돌다

느닷없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소루쟁이 풀들이 대낮에도 괭이들을 들쳐메고

둘러선 내 마음엔

바닥 없는 푸른 우물이 오래 묵어서 숨어 있다

 

 


 

 

노향림 시인 / 꿈

 

 

바다가 앞에 와 있었다

뻘밭 사이에 처박고 있는

그의 얼굴이 늘 보고 싶었다.

신음소리가 귀신이 되어 나오던

집 한 채.

철사토막 같은 손으로

바다소나무들은

앙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 냄새가 그리웠다

긴 복도 끝

육조 다다미방(房)에 복막염으로

나는 누워 있었다

사금파리, 야생초, 생고무냄새

바람사이의 흐릿한 호얏불,

오래 문닫힌 대장간에 쌓여 있는

정적(靜寂)들이 보고 싶었다

아, 손과 발을 달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소리들이 보고 싶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

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

묻어났다

바다는 늘 앞에 와 있었다.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