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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초파일 밤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 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 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상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을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가욱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상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말 꽃 같네요 참말 꽃밭 같네요.
애린, 실천문학사, 1986
김지하 시인 /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푸른 옷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 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든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워지지만 않는다면.
황토, 한얼문고, 1970
김지하 시인 / 풀에도 남북이 있는가
풀에도 남북 바람에도 남북 구름에도 남북 다람쥐에게, 노루에게, 사슴에게, 늑대와 호랑이에게도 남북이 있는가 양파에게도 남북의 대립이 있는가 흙에게도 남북 사이의 전쟁이 있는가 총에게도 이데올로기가 있는가 이데올로기 대결이 있는가 철조망의 쇠는 이데올로기를 의식하고 있는가 물에게도 새와 벌레에게도 있는가 없다 없다면 큰일이다 우리 모두가 천치 바보라는 증명이기 때문에.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한숨
겨울 깊다 땅은 한숨
눈부신 흰 한숨 은사시나무도 한숨
동짓날 밤 깊은 잠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쌔하얀 사슬 끄을고 한숨
이 기이한 겨울 한복판 봄 오는 소리 또 한숨.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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