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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 울타리꽃
아들아, 나 죽어 이 집의 울타리가 되리라. 칼 뽑아 네 어미 아름다움 버혀 가려던 눈먼 무리 앞에 무릎 꿇 순 결코 없어 황망한 칼빛 아래 내가 죽거든 아들아, 억새풀 엉겅퀴 새 돌 눌러 날 묻지 말고 우리집 마당 가운데 나직하게 묻어다오. 혹 떨어져 나간 내 뼈 있거든 밤마다 숫돌에 갈고 갈아 화살촉 만들고 흩어져 날리는 머리칼 있거들랑 빠짐 없이 추려 모아 화살줄 매어다오. 앞 못 보는 너희 아빌 핍박하러 오는 무리 날만 새면 사립문 앞에 눈 치뜨고 모이리니 내 어이 죽어선들 한적한 산그늘이나 떠돌며 다니리 아들아, 이 어민 속 붉은 꽃으로 꼭 다시 피어난다. 나 죽어도 내 집의 울타리꽃*으로 피어난다.
* 울타리꽃: 번리화, 목근, 목노 등의 이름을 가진 꽃으로 무궁화를 일컬음
玆菅Ì 마을에서, 창작과비평사, 1985
도종환 시인 / 인차리 4
벌판 한가운데 서면 소리들이 달려온다 심줄처럼 솟은 논두렁길로 줄지어 눈이 쌓이고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울음소리들이 뚝뚝 내게 떨어진다 머리채를 풀어 던지고 쓰러져 누운 산맥을 향해 겨울벌판 질러가며 사랑한다 사랑한다던 말을 생각한다 시린 내 왼손으로 오른손 맞잡아 비비며 따뜻하게 살자던 그 말의 온기를 생각한다 그대가 몇 달씩 얼고 갈라져 터지던 땅으로 누웠을 때 벼 그루터기처럼 촘촘히 박혀 뽑히지 않는 단단한 뿌리로 나도 당신 속에 있고 싶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소리 속으로 가고 있다 울면서 달려가고 있다.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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