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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지리산의 봄 2 - 반야봉 부근에서의 일박
지리산 반야봉에 달 떴다 푸른 보름달 떴다 서천 서역국까지 달빛 가득하니 술잔 속에 따라붓는 그리움도 뜨고 지나온 길에 누운 슬픔도 뜨고 내 가슴속에 든 망망대해 눈물도 뜨고 체념한 사람들의 몸 속에 흐르는 무서운 시장기도 뜨고 창공에 오천만 혼불 떴다 산이슬 털고 일어서는 바람이여 어디로 가는가 그 한가닥은 하동포구로 내려가고 그 한가닥은 광주로 내려가고 그 한가닥은 수원으로 내려가는 바람이여 때는 오월, 너 가는 곳마다 무성한 신록들 크게 울겠구나 뿌리 없는 것들 다 쓰러지겠구나
고정희 시인 / 지리산의 봄 3 - 연하천 가는길
형님,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가 있었다지요 일평생 연좌서명이나 하고 상소문만 올리다가 끝내는 역적으로 몰리고 말았다지요 모름지기 따스한 밥을 거부하고 등을 보이며, 다만 외로운 등을 보이며 갈대아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처럼 여벌 신발이나 전대도 없이 천둥벌거숭이 되어 떠났다지요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지요 산나물 뜯어먹고 마파람 소리로 펄럭이던 사람, 어용으로 타오르는 산불에 바베큐가 될망정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던 사람,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날에는 중국 대륙 백성들도 찬밥을 먹고 진달래꽃처럼 울었다지요 진달래꽃으로 산을 덮었다지요 형님, 이상도 하여이다 진나라 개자추가 뜯어먹던 산나물이 연하천 가는 길에 가득 돋았습니다 곰취나물 개취나물 떡취나물 참취나물 파랗게 새파랗게 숲길을 덮고 그가 달빛 밟으며 뿌린 피눈물 가도가도 끝없는 진달래꽃으로 피었습니다 이 어찌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으리요 잠시 능선에 발길을 멈추고 분홍숲길 이루는 꽃잎 쓰다듬자니 다시는 고향에 올 수 없는 사람들 한뎃잠 설치며 웃는 소리 들리고요 지 한몸 던져 불이 된 사람들 이산저산에서 봇물 되어 구릅니다.
고정희 시인 / 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고정희 시인 / 천둥벌거숭이 노래 1
지도에도 없는 숲길을 갑니다 태양이 호수에서 금발을 흔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바하의 악보를 오솔길에 깔았더니 무반주 첼로의 서늘한 그림자가 지구의 머리칼에 고요히 걸립니다
내가 당도할 문은 아직 멀었습니다 숲에 별 뜨고 바람 부는 밤 모든 언어에 빗장을 지른 뒤 찔레꽃 향기가 심장을 가릅니다
어둠뿐인 하늘에 당신을 그립니다 오늘밤은 이것으로 따뜻합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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