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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철 시인 / 연날리기
한번 날아 보구 싶어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오온 동네방네 쏘다녔던 그 어릴 때처럼 훌훌훌 코 흘리면서 한번 날려 보구 싶어라 이 고요한 언덕배기 위에 두 다리 벌리고 서서 높이 날려 올리고 싶어라 언젠가 바람은 불어오리라 흔들리지도 않는 높은 산봉우리를 그저 바라보며 소리도 없이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돌아다보면 오 광활한 세계 평평하고 푸른 세계의 잔잔한 침묵 언젠가 숨막히는 함묵은 깨어지고 순하고 순하지도 않은 바람은 저도 모르게 갑자기 느닷없이 일어나리라 저 낮은 곳의 푸르른 벌판으로 빽빽한 수천 수백만의 착한 벼포기들이 한꺼번에 술렁술렁 흔들리면서 바람은 이 호젓한 언덕 위로 멍멍멍 잡초들만 무성한 이 언덕배기로 슬픈 사랑처럼 달려오리라 아직 미처 고개 수그리지 못한 수천 수백만의 착한 벼포기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익은 열매 터지듯이 툭툭툭 깨어나면서 웅성웅성 흔들리면서 바람은 일어나리라 언젠가 바람 불어오면 한번 날려 보구 싶어라 이 부끄러운 언덕배기 위에서 날려 보구 싶어라 너무 기뻐서 마구 웃으면서 울면서 먼지 쌓인 얼레를 풀어 주고 싶어라 달달달 풀어 주고 혹은 서서히 조금 잡아다녔다 다시 풀어 주고 자유롭게 더 자유롭게 풀어 주고 그러다 실이라도 그만 툭 끊어지면 아아아 고함지르며 달려가고 싶어라 돌아다보면 저 광활한 세계 함께 숨쉬고 함께 자라면서 동화 속의 난장이들처럼 함께 잠자는 평평하고 푸른 세계의 말 없는 약속 언젠가 바람 불어오면 그 바람을 마시면서 끝도 없이 바람 잔잔한 이 뜨거운 계절을 지루하고 지루한 닫혀 있는 시간들을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추억하고 싶어라 너무 기뻐서 마구 울면서 웃으면서 정직한 역사처럼 텅 빈 저 허공 위로 날려 올리고 싶어라 방패연 날려 올리고 싶어라 가오리연 질긴 생명의 가느다란 실을 풀어 한번 날려 보고 싶어라 한번 날아 보고 싶어라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용의 모습으로
1
어둠의 늪 속에서 뒤척이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무기 한 마리 벗어도 벗어도 달라붙던 밤의 허물 벗어버리고 입으로 빛을 뿜으며 하늘로 솟아오른다 온몸의 비늘 번쩍이며 날카로운 네 발로 구름 헤치고 새벽 하늘로 날아오른다 사슴처럼 드높은 뿔을 세우고 앞날을 쏘아보듯 두 눈을 부릅뜨고 마음의 소리까지 알아듣는 어진 귀를 쫑긋거리며 용의 모습으로 떠오르는 우리의 꿈을 보아라 때로는 천둥번개 장난치고 눈을 내려 하얗게 세상을 뒤덮고 달빛 속에 혼자서 생각에 잠기는 용의 모습으로 올해는 산과 강과 도시와 마을 곳곳의 하늘 위에서 떠돌며 머물 것이다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김광규(金光圭),「용의 모습으로」, 『좀팽이처럼』(문학(文學)과지성사(知性社),1988)〕
2
애초에 비둘기를 기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십년이 지나도록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며칠 전에 마당을 쓸다가 보니 하얀 비둘기 두 마리가 그 속에 앉아 있지 않은가〔~〕
비둘기의 그 조그만 가슴 속에 다른 하늘과 다른 땅이 있고, 그 가는 핏줄 속에 다른 물이 흐르고 다른 바람이 불고 있음을 나는 십년 동안이나 몰랐던 셈이다.
―하얀 비둘기 중에서
용의 모습으로, 청하, 1990
박남철 시인 / 우리들의 변태성욕
생각해 보면 나에게 아직까지 한 자루의 만년필과 한 자루의 생각의 탄환이 남아 있다는 한 자루의 희망과 한 자루의 고마운 일들이
생각해 보면 꺼지지 않는 이 잠들지 않는 성욕의 한가운데 서울역 도동 어느 여관방 고마운 일이다 그녀가 그토록 늦게 나를 천정 끝까지 물고 늘어져 준 일은 아이구 찢어져요 그녀는 나의 어깨를, 윽, 덥썩 깨물면서 (성욕은 이미 두 번째 거세되어 버린 우리들 선량한, 윽, 하루살이들의 하릴없는 자기 검열의, 윽, 비명) 더, 더, 더, 더 깊이요, 나는 그녀에게
만 원짜리 한 장밖에는 더 주지 못했지만
〔`이하 생략 ─자기 검열에 의함'〕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우리 죽고 나야 이 세상에 평화가
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만약에 밥의 질서 속에 뛰어든다면 누구보다도 더 독종이 되리란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1
어떤 때 문제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내가 `30만원짜리'라는 것, 그리고 내 아내가 아무런 직장도 안 가지고 있다는 것(못 가지고 있다는 것)
시골의 늙고 병든 부모님들이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계시다는 것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이제 몇 달 후면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동생에게, 니 대학은 내가 시키는 거다─고 자신 만만하게 약속을 했다는 것
약속 이전에 내가 그의 나이에 우리가 얼마나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
문제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대학에 다니면서 나는 연애를 했고 국문과에 적을 둔 시골 출신의 가난한 대학 4년생이었던 나는 결국 실연을 했고 실연의 후유증으로 나는 몇 편의 시(詩)를 썼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도 시(詩)를 포기할 자신이 없다
2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 편의 위대한 시(詩)와 동생의 대학과 누이동생들의 꿈과 늙으신 부모님들의 평화를 맞바꿀 자신도 없다
나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애를 두 번씩이나 지우고 있다 (그 애를 행복하게 키울 자신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시(詩)에서 매도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람들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내가 진실로 두려운 것은 과연 그들이 고통스럽기나 할 것인가, 고통스럽다면 대체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나는 내가 시(詩)에서 매도해 마지않는 이 세상의 밥의 진실과 시(詩)의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흔적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거의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니 나 같은 인간은 밥의 법(法)에 순응하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또는 밥의 법(法)
에 알맞게 방법적인 싸움을 걸면서, 나름대로의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겠는가…… (가시라니! 내가 그럼 가시란 말인가!)
하여, 나는 죽고 싶다, 아니 이 세상은 아예 나 같은 사람들은 죽어 없어져야 조용해질 것 같다
3
내 죽고 나면 과연 이 세상에 평화가 오나요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제발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
우리가, 지금도 내 귀에는 우리라고 하지 말란 소리가 이 세상에서, 위에서 살아가는 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 뺨은 맞비비면서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 사는 것
서로의 성기(性器)를 맞부딪치면서 굶주리지 않고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의 행복을 지켜 주기 위해서 서로의 등을 토닥거려 주기 위해서 사는 것
그런데 왜 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한 사람은 자가용을 타고 주말 여행을 떠나지요? 왜 한 사람은 병원 문 앞에서 죽어가고 한 사람은 여인의─허벅지 위에서 죽어가지요?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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