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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시인 / 제설작업
살아도 오히려 힘에 또 겨울 벅찬 아픔과 감동의 시대였니라 연병장에 엄청나게 쌓인 눈산더미를 보며 일요일 제설작업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넉가래를 밀면 우리 힘만으로는 암만해도 모자랄 것 같은 눈은 지금도 쌓이며 넉가래 끝에서 묵직한 사랑의 감동이다 시력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하얀 반짝임. 눈물. 살아도 내사 다는 못 살고 돌아갈 시대 80년대까지 이렇게 산사태로 밀려오는 눈을 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죽어도 밀어도 밀어도 80년대까지 밀려드는 눈은 우리 자라다 만 키의 어깨를 넘칠 듯, 넘칠 듯 우리 서툰 넉가래질을 덮쳐 삼킬 듯, 그러나 눈발 속에서 아이가 운다 배가 고파서 살려주셔요 소리같이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지 마셔요 소리같이 윙윙대는 눈보라 현수막 흩날리는 전쟁구호 뒤에 저희들이 있다는 듯이 눈은 아직도 쌓이고, 넉가래질은 서툴고 땀에 흐려진 시야 주먹으로 닦아내면 담벼락에 엉겨붙은 하얀 잔설 풍경엔 핏자국이 묻어 있다 아름다움엔 피와 살기가 묻어 있다 온통 하얘지는 세상에 일렬종대 그대는 아직도 고통에 갇혀 지내고 연병장에 쌓인 눈을 밀면서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로 살아 남은 것은 우리의 앞이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안 했기 때문이 아니다
좋은 꽃, 민음사, 1985
김정환 시인 / 지하철 정거장에서 1
말하라 우리가 이젠 벅찬 한줌의 먼지로 서서 열차가 도착하는, 발 밑의 지축을 울리는 경적소리 그 몰고 오는 풍파의 장엄이나마 온전히 온전히 가슴 설레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열차는 기다림 속 무언가 가여운 떨림을 산산조각 내는 속도와 방향으로 들어온다
이 조그만 도착의 운동에도 흩날려대는 갈채 같은, 환호 같은 슬픔의 나부낌!
그러나 진실은 훨씬 더 우람하고 시끄럽고 두려운 소리로 온다
아직도 버팅겨 있음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율의 함성으로 온다
기다려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훨씬 더 아픈 훨씬 더 심장이 터질 듯 벅찬 감격으로 오리라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김정환 시인 / 철길 위에 쓴다
무쇠와 근육을 부딪쳐 근육과 눈물을 부딪쳐 울컥이며 가자 만국의 노동자 덜커덩거리는 것은 시대일 뿐 우리들의 심장은 촉촉하고 강하다 음침한 것은 또한 화려하다 대낮 햇빛 밝은 시절의 영롱한 인간이여 미래여 우리가 걸어온 함성 위에 굵은 눈물로 더욱 강인한 철길 위에 드디어 우리는 자유라고 쓴다 갈 길 위에 쓴다 오 진정한 자유
기차에 대하여, 창작과비평사, 1990
김정환 시인 / 최고의 사랑은
끝끝내 아내는 운다 전교조(全敎組)의 아내 우리는 쁘띠 아니냐고, 애새끼들은 어쩔거냐고, 일순 기차는 덜컹대고 그 틈에 핑 돌던 것이 흩뿌려 차창 밖에 비가 내린다 그러나 아내여 어차피 자본주의에서 최고의 사랑은 계급동맹이다 덜컹대며 기차는 달리고 세상은 영화처럼 차창 밖에 있지 않다 자유는 자급 자족에 있지 않고 평화는 농촌 풍경에 있지 않고 사랑은 차창 밖에 있지 않다 오늘밤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몸과 몸을 섞듯이 몸을 섞으며 덜컹덜컹 달리듯이
기차에 대하여,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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