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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시인 / 물방울 칩
콩나물 싹들이 물방울을 타고 튀어 오른다 안경 너머의 안경 속 스펙트럼, 왜 식물들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올릴까?
감기로 인해 방안에 가습기를 틀어 놓았다 물방울로 자란 내가 풀잎처럼 가라앉는다
간밤에는 산 계곡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찾지 못한 채 물방울이 되었다 미지수의 미결수, 어디로 가야 길을 만날 수 있을까
죽음의 굴레를 목에 걸친 채 유서를 쓴다 새털 같은 예금 잔고의 비밀번호와 무덤 숲에 들어 갈 음악에 대하여
어둠의 잉크가 짙게 물드는 그늘 갈피에서 나는 나를 지우는 물방울이 된다
계간 『시와 세계』 2019년 가을호 발표
이영춘 시인 / 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
첫 번째 한 번은 누군가가 나에게 변비약을 사 오라 하여 건넜고 두 번째는 누군가가 나에게 뼈 튼튼해지는 칼슘치즈와 우유를 사 오라 하여 건넜고 세 번째는 누군가가 햇반을 사 오라 하여 그 길을 또 건너갔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나는 의문에 의문을 품으며 그 길을 건너고 또 건넜다
첫 번째는 불통으로 꽉 막힌 세상을 뚫고 싶은 욕망의 약인가 보다 생각하며 기꺼이 건넜고 두 번째는 골격이 무너져 내리는 청년들의 혹은 내 집 아이들의 그리고 푸른 황금기를 빗겨간 내 뼈를 추스르라는 명령으로 그 길을 기꺼이 건너갔고 세 번째는 밥 하는 주부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너도 편승해 보라는 시대의 명령 같은 내 안의 내가 좋아서 그 길을 또 건너갔다
그러나 변비 앓는 사람은 이 밤에도 계속 통증을 호소하는 중이고 칼슘치즈와 우유는 금방 효능을 알 수 없으니 축적될 날을 기다려야 한다 햇반은 냉장고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닿을 내일 아침을 기다리는 중이다
계간 『시와 세계』 2019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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