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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춘 시인 / 물방울 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5.

이영춘 시인 / 물방울 칩

 

 

콩나물 싹들이 물방울을 타고 튀어 오른다

안경 너머의 안경 속 스펙트럼,

왜 식물들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올릴까?

 

감기로 인해 방안에 가습기를 틀어 놓았다

물방울로 자란 내가 풀잎처럼 가라앉는다

 

간밤에는 산 계곡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찾지 못한 채

물방울이 되었다

미지수의 미결수, 어디로 가야 길을 만날 수 있을까

 

죽음의 굴레를 목에 걸친 채

유서를 쓴다

새털 같은 예금 잔고의 비밀번호와

무덤 숲에 들어 갈 음악에 대하여

 

어둠의 잉크가 짙게 물드는 그늘 갈피에서

나는 나를 지우는 물방울이 된다

 

계간 『시와 세계』 2019년 가을호 발표

 

 


 

 

이영춘 시인 / 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

 

 

 첫 번째 한 번은 누군가가 나에게 변비약을 사 오라 하여 건넜고 두 번째는 누군가가 나에게 뼈 튼튼해지는 칼슘치즈와 우유를 사 오라 하여 건넜고 세 번째는 누군가가 햇반을 사 오라 하여 그 길을 또 건너갔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나는 의문에 의문을 품으며 그 길을 건너고 또 건넜다

 

 첫 번째는 불통으로 꽉 막힌 세상을 뚫고 싶은 욕망의 약인가 보다 생각하며 기꺼이 건넜고 두 번째는 골격이 무너져 내리는 청년들의 혹은 내 집 아이들의 그리고 푸른 황금기를 빗겨간 내 뼈를 추스르라는 명령으로 그 길을 기꺼이 건너갔고 세 번째는 밥 하는 주부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너도 편승해 보라는 시대의 명령 같은 내 안의 내가 좋아서 그 길을 또 건너갔다

 

 그러나 변비 앓는 사람은 이 밤에도 계속 통증을 호소하는 중이고 칼슘치즈와 우유는 금방 효능을 알 수 없으니 축적될 날을 기다려야 한다 햇반은 냉장고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닿을 내일 아침을 기다리는 중이다

 

계간 『시와 세계』 2019년 가을호 발표

 

 


 

이영춘 시인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시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 놓고』, 『네 살던 날의 흔적』, 『슬픈 도시락』』, 『시간의 옆구리』, 『봉평 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와 시선집『들풀』『오줌발,별꽃무늬』 등이 있음. 윤동주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인산문학상. 강원도문화상. 동곡문화예술상. 한국여성문학상. 유심작품상 특별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