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향림 시인 / 들길
잡초 무성한 들판을 걷는다 기억을 잃은 시아버지의 한 달분의 약 처방전 받으러 가는 길 로도핀 아라셉트 치매약 성분의 알약을 삼킨 탓일까 서로 다른 몸짓으로 쑥부쟁이 개쑥 냉이 땅버들도 멍한 낯빛을 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입 속에 가득 넣고 굴린다 흩어지는 햇살이 멀리 양평 쪽 강물 위에 은화(銀貨)처럼 쏟아져 구른다 그 속을 거꾸로 처박힌 얕으막한 산들이 팔짱을 끼고 비껴서 있다 하반신에 풀이 돋는 바위도 보인다 치유할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면 산풀도 나즈막하게 얼굴이 뜨는 것일까 버드나무가 발바닥 적시며 몸 가렵다고 바람 속에서 박박 긁는 소리 발소리 죽이고 아치형 철제 대문이 슬몃 열린 병원 안마당에 들어선다. 아무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두 잊은 끝모를 시간만이 고여 있다
노향림 시인 / 말 1
어떤 말[言語]인지 말은 가끔 아파트 베란다에 걸터앉아 저녁해가 지는 것을 혼자 바라다 보기도 하고 훌쩍 어둠 속 어디엔가 사라져 버립니다.
말에게도 뼈가 있고 살아 있는가 봅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어느 날은 어둑하게 창 밖에 서 있거나 느닷없이 1층에서 5층까지 쿵쿵쿵 소리를 냅니다.
어느 때는 매일 밤 매일 낮 온 동네를 소리없이 헤매다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말의 얼굴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말은 이제 바람이거나 허공에 사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문학사상사, 1987
노향림 시인 / 몇 채의 마을
안식(安息)으로 몇 채의 마을은 지어져 있다 그 해의 첫 추위가 오고
눈 내리깐 채 허리동아리 뿌옇게 얼어버린 겨울해.
등성이마다 감각(感覺)을 잃은 꽃 몇대가 심겨져 있고
몇몇 풀들은 아직도 파랗게 성깔을 죽이지 않고 있다.
작은 살림집 마당에 저 혼자 기웃거리는 저무는 날의 까칠한 얼굴.
어느 때부턴가 자귀나무들은 말문이 막힌 채 자라가고
무심한 듯한 시절이었다.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정환 시인 / 해방서시(序詩) 외 3편 (0) | 2020.02.17 |
|---|---|
| 김정환 시인 / 취바리 외 3편 (0) | 2020.02.16 |
| 박남철 시인 / 이혼 외 2편 (0) | 2020.02.16 |
| 고정희 시인 / 청산별곡 외 2편 (0) | 2020.02.16 |
| 도종환 시인 / 접시꽃 당신 외 1편 (0) | 2020.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