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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들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6.

노향림 시인 / 들길

 

 

잡초 무성한 들판을 걷는다

기억을 잃은 시아버지의

한 달분의 약 처방전 받으러 가는 길

로도핀 아라셉트 치매약 성분의

알약을 삼킨 탓일까

서로 다른 몸짓으로 쑥부쟁이 개쑥

냉이 땅버들도

멍한 낯빛을 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입 속에

가득 넣고 굴린다

흩어지는 햇살이 멀리 양평 쪽 강물 위에

은화(銀貨)처럼 쏟아져 구른다

그 속을 거꾸로 처박힌 얕으막한 산들이

팔짱을 끼고 비껴서 있다

하반신에 풀이 돋는 바위도 보인다

치유할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면

산풀도 나즈막하게 얼굴이 뜨는 것일까

버드나무가 발바닥 적시며 몸 가렵다고

바람 속에서 박박 긁는 소리

발소리 죽이고 아치형 철제 대문이 슬몃 열린

병원 안마당에 들어선다. 아무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두 잊은

끝모를 시간만이 고여 있다

 

 


 

 

노향림 시인 / 말 1

 

 

어떤 말[言語]인지 말은 가끔

아파트 베란다에 걸터앉아

저녁해가 지는 것을 혼자

바라다 보기도 하고 훌쩍

어둠 속 어디엔가 사라져

버립니다.

 

말에게도 뼈가 있고 살아

있는가 봅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어느 날은

어둑하게 창 밖에 서 있거나

느닷없이 1층에서 5층까지

쿵쿵쿵 소리를 냅니다.

 

어느 때는 매일 밤 매일 낮

온 동네를 소리없이 헤매다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말의 얼굴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말은 이제 바람이거나

허공에 사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문학사상사, 1987

 

 


 

 

노향림 시인 / 몇 채의 마을

 

 

안식(安息)으로 몇 채의 마을은 지어져 있다

그 해의 첫 추위가 오고

 

눈 내리깐 채 허리동아리 뿌옇게

얼어버린 겨울해.

 

등성이마다 감각(感覺)을 잃은

꽃 몇대가 심겨져 있고

 

몇몇 풀들은 아직도

파랗게 성깔을 죽이지 않고 있다.

 

작은 살림집 마당에 저 혼자 기웃거리는

저무는 날의 까칠한 얼굴.

 

어느 때부턴가 자귀나무들은

말문이 막힌 채 자라가고

 

무심한 듯한 시절이었다.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