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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시인 / 해방서시(序詩)
우리는 대대로 푸르디푸른 하늘만을 섬기며 살고 싶었습니다 날새면 해 노래 들판에서 평야 노래 호미 씻으며 호미 노래 우리는 대대로 휜옷에 흙 묻히고 맨발로 사는 순박한 백의민족이고 싶었습니다 봄이면 모심기 노래 가을이면 추수 노래 보름마다 달 노래 그러나 우리의 바다는 피바다 우리의 삶은 피 묻은 삶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노래에는 살기가 묻어 있습니다 젖가슴 같은 어머니 대지 위로 침략의 창칼이 꽂히고 외국산 탱크가 가죽군화가 허리를 짓밟으며 마침내 도려냈습니다 땅에서 솟아나온 피가 우리의 억눌림과 흰옷과 빼앗김과 가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허리 잘린 한반도에서 피 묻은 목숨 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는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농토와 양식과 처자와 순결한 삶과 아름다운 추억마저 빼앗겼지만 억눌리면서 희망의지와 빼앗기면서 구원의지와 헐벗으면서 가난의 근육 불끈불끈 솟는 힘과 피묻어 처참하게 아름다운 흰옷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것은 더 이상 빼앗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억눌릴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간직해야 할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버림받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싸우는 것만이 구원하는 길입니다 해방된 공동체를 위하여 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이 두 동강난 한반도에서 피묻은 발 버팅겨 싸우며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밭갈고 씨뿌리며 이 땅을 우리 아픈 몸의 일부로 삼고 살면서 명심해야 합니다 싸우는 것만이 사랑하는 길입니다 탐욕과 학살의 비린 살점 묻은 쇠붙이 그 위에 물들어 썩은 제국주의의 세상천지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꽃, 민음사, 1985
김정환 시인 / 핵반대노래
그러나 우리는 살아 남는다 제3차 세계대전 핵폭탄이 터져도 그러나 우리는 살아 남는다 물집 생긴 살갗으로 포도송이로 뒤틀린 얼굴 두려운 눈빛 그러나 빙신같이 빙신같이 침흘리며 껴안는 사랑도 처절한 사랑, 그러나 좀더 구원인 사랑 외눈박이로 팔병신으로 앉은뱅이로 곱사등이로 사랑하리라 우리 헐벗은 마음으로 잿빛 허허벌판으로 사랑하리라 우리 헐벗은 몸으로 헐벗음으로 헐벗고 빼앗긴 자는 살아 남는다
강한 힘이 약한 힘을 쓰러뜨리는 저 백열의 하늘 아아 힘이 힘 스스로를 쓰러뜨리는 저 적열의 하늘 삽시간에, 온 천지가, 오 산천초목이, 뜨거움과, 목마름과, 헐벗음으로 바뀌고 그러나 죽어도 우리의 가난은 살아 남는다 그러나 죽어도 우리의 약함은 살아 남는다 그러나 죽어도 우리의 짓밟힘은 살아 남는다
발기발기 찢어진 살점 피눈물로 꿰매며 강한 자여 그대의 힘으로 우리의 약함을 없앤다고 생각하지 말라 힘이 쓰러뜨리는 것은 그대 스스로의 힘뿐 힘이 스스로 무너져 처참할 때 가장 헐벗은 자는 살아 남는다 강한 자여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마침내 우리는 헐벗은 사람으로만 살아 남는다
아프리카 검붉은 핏줄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아시아 굶주린 노동 파리한 얼굴로 강한 자여 힘으로 그대 향수 뿌린 탐욕의 얼굴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도 마침내 살아남는 것은 살거죽 벗겨진 헐벗은 사람으로만 살아 남는다
강한 자여 그대의 뉘우침으로 짓밟는 자여 그대의 발바닥으로 빼앗는 자여 그대의 손아귀로 침략하는 자여 그대의 총칼로 가진 자여 그대 그 썩은 재물의 악취로 핵전쟁을 막으라 헐벗음을 막으라
좋은 꽃, 민음사, 1985
김정환 시인 / 호미씻이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할배 얼굴이 육신 썩은 땅내음 이슬 묻은 풀내음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검은 땀이 등덜미 터진 논밭 무쇠 근육 타는 해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비린 살점이 붉은 피 묻은 곡식 죽창의 땅 적신 피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산과 들판이 일과 밥과 자유와 평등과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흙 가슴이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눈물 콧물이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우리들 미래가
내내 풍요롭도록 내내 즐거웁도록 다시는 빼앗기지 않도록 다시는 살륙 없도록 내내 평화롭도록
타는 해에 호미 씻어라 무쇠 근육에 호미 씻어라 솟는 살기에 호미 씻어라 죽은 얼굴에 호미 씻어라 빼앗긴 땅에 호미 씻어라 흙 가슴에 호미 씻어라 우리들 목숨 호미 씻어라 우리들 무기 호미 씻어라
좋은 꽃, 민음사, 1985
김정환 시인 / 홍은동에서
아무래도 이 축대는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산의 허리를 빠수어서 바윗덩어리 양 옆으로 밀어붙인 밀어붙여 간신간신히 내놓은 이 길은 길이 아니다 배반이다 쌓아올려진 흙, 바위, 나무뿌리들은 출렁출렁 넘쳐 철책을 넘어 흘러내리고 흐른다는 것은 자세히 보면 살벌하고 뜨겁게 내리치는 함성 길은 다시 길이 되려고 외치고 이쪽 바위와 저쪽 바위가 만나 산산이 부서지는 함성으로 지체야 낮아도 좋다 못나도 좋다 한데 어울려 살 수만 있도록 만나게 해다오 껴안게 해다오 철책 사이로 수없이 양팔을 내어 흔들며 아무래도 이 축대는 무너져내릴 것 같다 한데 모여라 모여라 모여라 소리 어디선가 들리고 와르르 쿵쾅 우지끈 뚝딱 헐벗고 쫓겨난 것들이 끼리끼리 만나 서로를 파묻고 서로의 품에 파묻히는 소리 들리고 먼데서 부릅뜬 주먹이 부릅뜬 주먹을 만나는 주먹의 아비규환의 사랑소리도 들리고 아무래도 이 축대는 무너져내릴 것 같다 흐른다는 것은 자세히 보면 무섭고 아찔한 저 꼭대기 낭떠러지 산사태인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 축대는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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