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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1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7.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1

 

 

수유리에

서늘한 산철쭉이 피었다 진 후

무서운 기다림으로

산은 깊어지네

무서운 설렘으로

숲은 피어나네

핏물 든 젊음의 상복으로

아카시아 흰꽃이 온 산을 뒤덮은 후 뜨겁고 암담한

우리들의 희망 위에

몇 트럭의 페퍼포그와 최루탄이 뿌려지네

외로운 코뿔소들이 그 위를 행진하네

오 나의 봄은 이렇게 가도 되는 것일까

 

하늘에 칼을 대는 산바람 속에서 긴긴 봄날, 띵까띵까

서울의 백성들은 가무를 즐기고

쓸쓸히 목을 꺾은 젊은이의 무덤에

넋을 달래는 진혼제가 올려진 후

나는 생각하네, 친구여

한 나라의 자유를 위한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복종이기에

간을 적셔 쓴 몇 줄의 시로는 나

구원받지 못하리라 예감하네

더운 목숨의 외로움 탓으로

칼이 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언어와

끈질긴 목숨의 죄 때문에

훼절로 부지하는 당대의 문화가

어느 날 꽃이 피긴 피리라는 중도보수주의는

필경 무덤까지 따라와

수세대에 이어질 쇠사슬로 덮일 것이네

오 우리들의 광장엔 광대들뿐이고

누군가의 빈손이 허공을 휘젓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2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과학자와 예술가들은 결코 신봉하지 않았던 사상에 대해서 지지를 표명합니다. 그들은……자신의 작품 일부를 스스로 삭제하고 변형시켜버립니다. ―Vaclav Havel의 「자유와 문화에 대한 구속영장」

 

 

오 친구여

부분적으로 회색을 띠지 않고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간통의 시대에서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누가 깨끗함을 앞세울 수 있을까

 

한때 이 시대의 기둥서방이었던 그가

악마의 레이다에 포착되고

차츰 좁혀지는 악마의 포충망에

한 거인은 꺼꾸러졌다

하얀 수술대에 포박된 그는

무서운 굉음 속에서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악마의 날렵한 집도가 한일자로

그의 가슴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 수술대 위에는 그의

펄떡거리는 양심과 정조와 내장이

붉은 피에 젖어 꺼내지고

아련한 붕괴의 소리와 함께

그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다만 그는 홀로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빈 가슴 속에는

악마의 혈통에서 발명된

새로운 양심과 정조와 내장이

컴퓨터로 입력되었다

 

그는 이제 어제의 그일 수 없었다

은밀한 곳에서 악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컴퓨터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고

그의 우수했던 머리와 손발을

입력의 명령대로 작동했다

오, 그는 훌륭한 먹이가 되어

페르시아 융단을 밟으며

악마의 사절로 외교여행에 오르거나

아우슈비츠로 향하여

가스실의 안전을 입증했다

그는 번민 없는 인간이 되었고

신념을 갖지 못한 지도자로 찍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많은 백성들은

아무도 그의 포박당한 과거를 책임지지 않은 채

그가 박제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무수한 화살을 쏘아 보냈다

 

신바람 난 악마는

깊은 밤 조니워카를 마시며

키들키들 웃곤 했는데

그때마다 짙푸른 산곡에서는

웬 소쩍새 홀로 깨어

피를 토하듯 울 뿐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악마의 사령탑에서는 여전히

레이다에 포착된 기둥서방을 겨냥하여

박제수술이 면밀히 설계되고

악마의 집도를 외면한 식자층은

수술실에 포박될 사람들을 위하여

화살과 돌을 준비했다

오 친구여

부분적으로 화간을 허용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불륜의 시대에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누가 그를 정죄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3

 

 

 

 

에둠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포도주로)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보스라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 나는 혼자서 (포도주) 술틀을 밟아야 했다 너무나도 노여워 나는 그것들을 마구 밟았다. ―이사야 63:1~3에서 전용

 

 

이십대의 시퍼렇게 살아 있는 말들이

문둥병 감염으로 무인도에 격리수용 중인 동안

`사자왕국'의 모든 신문은

이빠지고 귀빠진 늙은 말들로

조간과 석간을 만들어 냈다

정치면과 사회면에 안보론이 개입되고

태평양을 건너온 오리지널 뉴스는

세관을 통과하다 거의 마모되었는데

수입상품 코너에 진열된 말들이란

먹는 것과 입는 것에 국한되었다

 

이런 사태가 감행된 처음에, 많은 사람들은

눈멀고 귀먹은 늙은 말들 사이에서 혀를 끌끌 차며

신문구독을 사절하거나

방송보도를 아예 외면하더니

글의 행과 행 사이를 읽는 법이 터득되면서

유언비어를 만드는 재미로

예전의 입맛을 바꾸고 말았다

신문은 다시 배로 증가되었고

보도되지 않은 것은 믿지 않게 되었으며

대량 생산된 `신품종' 말들이

모든 대학가로 수송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자왕국'의 모든 시민은

선진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신품종 언어로만 말하도록 의무화되었다

그로부터 십팔 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인도에 수용중인 살아 있는 말들이

천신만고 끝에 섬을 탈출하여

누더기옷을 걸치고

히피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십팔 년 전 모습을 잊어버린 시민들은 도처에서

수상스런 말에 대한 반상회를 열었고

대학가 곳곳에서는

참말의 진정성 여부를 두고

당국과 격돌이 벌어졌는데

안정이 우려된 많은 교육자와 공무원과 상인들이

이 일의 흑백을 언론에 위탁하자

청부업에 능통한 언론은

탈출해온 말들을 `불온'으로 몰았다

그리하여 참말들은 재수용되거나

앞니가 빠진 소리를 냈으므로

십팔 년 전 발음을 낼 수는 없었다

이 일에 말려든 하느님께서

피로 물든 소복을 하시고

말을 팔아먹는 시인들을 만나러

사자왕국으로 오고 계셨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6. 9】 시인

본명은 성애.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