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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철 시인 / 장래 희망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7.

박남철 시인 / 장래 희망

 

 

    `저 얼마나 좋은 풍경입니까……'

 

`사랑방중계'라는 TV 프로에

`여름소년'이란 르뽀가 나왔다

경기도 어느 시골의 개울에서

네 소년이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중 한 소년에게서 화면이 스톱되며

그 소년의 소개가 나왔다

 

    `박의원 걸은국민학교 5학년 장래희망 의사'

 

소년들은 그물로 물방개며

물고기를 잡아 올리고 있었다

이윽고 고추잠자리가 날고 있는

그 소년의 집안 풍경이 나오며

농부인 듯한 아버지와 역시 농부인 듯한

어머니가 고추를 가위로 썰고 있었다

 

허술한 그 농가 풍경과 소년의 아버지의 얼굴이

소년의 공부하는 표정이 갑자기 누군가의 `자 이젠'

 

`시원한 풍경을 보았으니 그만 다음 고개로 넘어가 볼까요'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젊은 북녘 시인에게

 

 

도서출판 푸른숲의 청탁이 있어

`젊은 북녘 시인에게'

편지 쓴다.

 

젊은 북녘 시인 동무,

 

그런데 젊은 북녘 시인 동무……

 

이렇게 적어 놓고 봐도 `젊은 북녘 시인 동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북녘 산하도 떠오르지 않는다…… `일선에 계신 국군 장병', 떠오르는 것은 다만 북한 지도와 `동무는 반동이야요!' 하는 어릴 때의 어떤 목소리들뿐이다. `일선에 계신 국군 장병 아저씨께',

 

아아, 어릴 때의 어떤 장난꾸러기들 소리뿐이다.

 

"동무는 반동이야! 날래 걸으라우, 이 종간나쌔끼!"

 

러시아집 패설, 청하, 1991

 

 


 

 

박남철 시인 / 졸업(卒業) 또는 담배

 

 

    `학교라는 장(場)은 개인의 교육장이며 실수(失手)를 통해 교습하는 곳이다'

 

1

 

선생님은 이제 담배를 끊으시겠다며

나를 주셨다

 

피울 때는 즐겁게 버릴 때는 깨끗이

 

담배야 담배야 담배야

나하고 죽자

너하고 나하고

 

어차피 선생님

 

담배야 담배야 담배야

낯선이도 담배를 끊겠단다(당신 졸업(卒業)했어요?)

 

2-1

 

당신 혹시 뒷문으로 들어오지나 않았어요?

 

2-2

 

선생님들은 이제 담배를 끊으시겠다며

나를 주셨다

 

가 도로 뺏아가셨다가

도로 주셨다

 

(나는 잉잉 울었다, 나는 어른이 되기 싫어요…… )

 

3

 

나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하는 이 말을 나는 배웠어요)

이젠 정말 끝장입니다

 

4

 

학교라는 장(場)은 개인의 교육장이며 선생님들도 배우는 곳입니다─이거 봐 깨졌잖아 그건 깨진

나는 정말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동시에 사랑하지 않습니다(바로 이게 중요합니다)

 

왜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아자차카타파하­가나다라마바사'라고 하시지요?

 

……하는 저의 이 말은 또다시 저에게로 되튀어 와서 또 담배를 피우게 만듭니다

 

5-1

 

아니! 이럴 수가! 오오오오오…… (이때 다시 들이붓는 물! 바로 이게 중요하다!)

 

 5-2

 

됐다! 이젠 정말 `어머니머니니이이이……'라고 외쳐도 된다

 

5-3

 

나는 어머니의 유리가 째지는 피를 보고 태어났으며

나는 아버지가 뿌려 놓은 정욕의 댓가로서 태어났으며, 아아

나는 타락해 버리지도 못한 이 세상(世上)을 침을 뱉으며 커 왔으며

아아 이제 나는 드디어 사랑을 배우고 방성 대곡을 하며 삼문(三門)을 떠난다

 

나는 무엇을 창업(創業)하게 될 것이며 무엇을 창업(創業)하지 못하게 될 것인가

 

6

 

핥, 들어라,

(듣기 싫으면 듣지 마라!)

 

7

 

손을 흔드시는 선생님 옆에는 더 넓어 보이는 한 사람이─

(아아아, 나는 드디어 어른이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주기도문, 빌어먹을

 

 

지금, 하늘에 계신다 해도

도와 주시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 섣불리 믿을 수 없사오며

아버지의 하늘에서 이룬 뜻은 아버지 하늘의 것이고

땅에서 못 이룬 뜻은 우리들 땅의 것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고통을 더욱 많이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미움 주는 자들을 더더욱 미워하듯이

우리의 더더욱 미워하는 죄를 더, 더더욱 미워하여 주시고

제발 이 모든 우리의 얼어 죽을 사랑을 함부로 평론ㅎ지 마시고

다만 우리를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두시겠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의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밤낮없이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시여

 

아멘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주기도문

 

 

지금, 하늘에 계시지 않은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나라이 말씀이 아니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그러나 땅에서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나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거시기는 단 한 방울도 내려 주시지 않으셨으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짓고 있는 자들을 모르는 척하고 있듯이 우리의 모르는 척하는 죄를 눈감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는 몇 만년이라도 우리의 시험이 계속되게 하여 주시고

다만 어느날 우연히 악에서 구하려 들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말해지고 있사옵니다, 언제나 출타중이신 아버지시여

 

아멘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朴南喆) 시인

1953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9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시 〈연날리기〉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와 『반시대적 고찰』(한겨레, 1988 / 세계사, 1999) , 『러시아집 패설』(청하, 1991)와『자본에 살어리랏다』(창작과비평사, 1997), 『바다 속의 흰머리뫼』 (문학과지성사, 2005), 『제1분』(문학수첩, 2009)과 시선집 『생명의 노래』(문학세계사, 1992) 와 박덕규와의 공동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청하, 1982)와 박남철 비평시집  『용의 모습으로』 (청하, 199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