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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모년모일(某年某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7.

노향림 시인 / 모년모일(某年某日)

 

 

모년모일(某年某日) 시간들은 얼어있다.

 

작은 몸집의 나무가 옴짝 못한 채 서 있다.

 

앉아서 즉결 재판소 건물이

눈송이로 뿔뿔이 날리는 문래동(文來洞) 일대를

양옆에 끼고 있다.

 

공중엔 가까스로 소리없는 하늘 하나를

걸어 놓았다.

 

망루(望樓)와 철조망들이

그 앞에서

희디 흰 잔해(殘骸)들로 쌓여갔다.

 

눈 한 송이로 된 아이가 나와서

덤덤한 배경으로 갈아입고 어울렸다.

 

오고있는 우리들 뒤로는

끝도 없이 앞날이 쓸려 내리고

쓸려 내리고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노향림 시인 / 바다 1

 

 

날마다 피나무 사이로 기어다니던

굶은 들쥐와 발톱 굵은 바람들이

몰려나와서

먼지 쓴 채 잠들어 있는 하늘과

오래된 수평선 모서리를

갉아 깨운다.

때로는 혼자 입을 앞발에 묻고 비빈다.

잠 속에서 깨어난 활자와

묵은 종이들이 못 이기는 척

부서져 내리고

내려가야지.

마음먹는 것일까.

그의 등뒤로 하얗게 눈이 내린다.

절망의 응답처럼.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문학사상사, 1987

 

 


 

 

노향림 시인 / 바다

 

 

부독본(副讀本)이 펼쳐져

한 페이지 속에

주먹만한 바다가

멍이 든 잔등을 지고

엎어져

터진 자리마다

사금파리로

와그르르 와그르르

쓸어내지는 바다,

바다.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