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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시인 / 모년모일(某年某日)
모년모일(某年某日) 시간들은 얼어있다.
작은 몸집의 나무가 옴짝 못한 채 서 있다.
앉아서 즉결 재판소 건물이 눈송이로 뿔뿔이 날리는 문래동(文來洞) 일대를 양옆에 끼고 있다.
공중엔 가까스로 소리없는 하늘 하나를 걸어 놓았다.
망루(望樓)와 철조망들이 그 앞에서 희디 흰 잔해(殘骸)들로 쌓여갔다.
눈 한 송이로 된 아이가 나와서 덤덤한 배경으로 갈아입고 어울렸다.
오고있는 우리들 뒤로는 끝도 없이 앞날이 쓸려 내리고 쓸려 내리고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노향림 시인 / 바다 1
날마다 피나무 사이로 기어다니던 굶은 들쥐와 발톱 굵은 바람들이 몰려나와서 먼지 쓴 채 잠들어 있는 하늘과 오래된 수평선 모서리를 갉아 깨운다. 때로는 혼자 입을 앞발에 묻고 비빈다. 잠 속에서 깨어난 활자와 묵은 종이들이 못 이기는 척 부서져 내리고 내려가야지. 마음먹는 것일까. 그의 등뒤로 하얗게 눈이 내린다. 절망의 응답처럼.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문학사상사, 1987
노향림 시인 / 바다
부독본(副讀本)이 펼쳐져 한 페이지 속에 주먹만한 바다가 멍이 든 잔등을 지고 엎어져 터진 자리마다 사금파리로 와그르르 와그르르 쓸어내지는 바다, 바다.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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