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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종기 시인 / 가을 서경(敍景)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7.

마종기 시인 / 가을 서경(敍景)

 

 

첩첩 깊은 산중 한구석에서 소리치고 찾아 헤맨다. 비맞고 눈 내리고 바람 부는 온 계절을 헐어가는 짐승이 되어, 눈은 닳아서 찢어지고 발은 피멍이 되어. 해가 바뀌고 아직 다 늙기 전에 나는 참다가 이 가을에 모닥불을 붙인다. 바람이 분다. 불이 넓게 붙는다. 온 산에 외롭고 고달픈 모든 영혼이 불탄다. 산도 타고 나도 타고 천지를 깨끗이 한 뒤, 드디어 내 눈에 당신이 보이고 내가 연꽃의 밤낮을 뛰어 우리는 만나고 어루만지고 포기하고. 그러나 결국은 모두 타서 숯이 되어 우리가 손 잡고 있으면, 한 천년쯤 뒤에 그 숯을 태우는 젊은 애인들이 우리가 아직도 밝고 뜨겁게 타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리라.

 

변경의 꽃, 지식산업사, 1976

 

 


 

 

마종기 시인 / 갈대의 피

 

 

내가 갈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죽은 듯 살아 있고

살아 있는 듯 몸을 흔들며

죽어 있기 때문이겠지.

 

죽고 사는 것이 같이 잘 섞여서

죽은 갈대가 산 것과 같이 노래하고

산 갈대가 죽은 갈대를 안고 춤추네.

 

평생 동안 한눈만 팔고 살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다 가게 하고

손 흔들어 보내면서 웃고 있네.

 

아끼기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팔목 한 번, 어깨 한 번 만지지도 않는구나.

만지고 싶어라, 날아가는 흰 갈대꽃!

매일 흘리는 피도 아무에게 보이지 않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2

 

 


 

 

마종기 시인 / 강원도의 돌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 속에 누워서 한 백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강토의 바람

 

 

불어오는 바람을 죽일 수 없다면

바람이 내는 소리도 죽일 수는 없지.

나무에게, 수풀에게, 나부끼는 깃발에게

소리내지 말라고 명령할 수는 없지.

모이는 장소가 따로 없는 바람들은

나라의 안팎 빈 곳에서 일어나고

바람이 내는 소리는 예감처럼 주위를 흔든다.

 

바람은 죽지 않는다.

한두 개의 바람이 방향이 같으면

둥그런 바람도 삼각형의 바람도

수백 개의 바람으로 몰리고

바람이 내는 소리는 도시의 방파제를 넘는다.

 

잠자는 바람을 깨우지 말자.

잠자는 바람의 흔적을 깨우지 말자.

바람이 고개를 숙이면

긴 목이 아프기 마련이고

그 목 쉰 바람 소리는 구시대의 암호처럼

언제나 강토의 살을 추위에 떨게 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 겨울 이야기

 

 

겨울은 어떻게 오던가.

빈 뜰에 이른 어두움 내리고

빛나던 강(江)물 소리 그치고

그 뺨에는 하얀 성애.

 

의정부행(議政府行)이었지,

뜻밖에도 눈이 내릴 때

마지막 밤 버스에

흔들리던 요한 계시록(啓示錄),

밤새 눈을 맞는

효부이천서씨지묘(孝婦利川徐氏之墓).

 

선종(善終)하는 노인(老人)의 웃음 끝에도

한 줄씩 조용한 눈물.

그 눈물의 속도(速度)처럼 아직

겨울은 혼자서 머물고 있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1939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연세대 의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월간 『현대문학』 1959년 1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발표 이후 3회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凱旋)』, 『두번째 겨울』, 『변경(邊境)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등의 시집과 공동 시집 『평균율』Ⅰ·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