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희 시인 / 대못
떠나올 때 눈먼 어머니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왔어요.
비바람 그치지 않는 정든 골목에서 여름에도 추워하는 내 친구들은 벙어리인 채 손만 흔들었어요.
한 줄 꿈도 없이 목메이는 기도도 없이
길이 너무 많아 길이 없는 이 나라는 내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냥 뛰어요 눈멀고 입다문 그 모습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안고서.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문정희 시인 / 마흔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까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찔레, 전예원, 1987
문정희 시인 / 바다 앞에서
문득, 미열처럼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서
서해 바다 그 서럽고 아픈 일몰을 보았네.
한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은 스러지고 주소도 모른 채 떠날 채비를 하듯 조용히 옷을 벗는 해안선을 보았네.
아, 자연 당신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소슬히 잊는 일뿐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눈과 파도와 비늘 같은 욕망을 잊는 일뿐이었네.
잊는다는 일 하나만 보석으로 닦고 있다 떠나는 날 몸과 함께 땅에 묻는 일이었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송연숙 시인 / 실타래 외 2편 (0) | 2020.02.17 |
|---|---|
| 마종기 시인 / 가을 서경(敍景) 외 4편 (0) | 2020.02.17 |
| 노향림 시인 / 모년모일(某年某日) 외 2편 (0) | 2020.02.17 |
| 박남철 시인 / 장래 희망 외 4편 (0) | 2020.02.17 |
|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1 외 2편 (0) | 2020.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