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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정희 시인 / 대못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7.

문정희 시인 / 대못

 

 

떠나올 때

눈먼 어머니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왔어요.

 

비바람 그치지 않는

정든 골목에서

여름에도 추워하는 내 친구들은

벙어리인 채

손만 흔들었어요.

 

한 줄 꿈도 없이

목메이는 기도도 없이

 

길이 너무 많아

길이 없는

이 나라는 내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냥 뛰어요

눈멀고 입다문 그 모습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안고서.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문정희 시인 / 마흔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까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찔레, 전예원, 1987

 

 


 

 

문정희 시인 / 바다 앞에서

 

 

문득, 미열처럼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서

 

서해 바다

그 서럽고 아픈 일몰을 보았네.

 

한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은 스러지고

주소도 모른 채

떠날 채비를 하듯

조용히 옷을 벗는 해안선을 보았네.

 

아, 자연

당신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소슬히 잊는 일뿐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눈과 파도와

비늘 같은 욕망을

잊는 일뿐이었네.

 

잊는다는 일 하나만

보석으로 닦고 있다

떠나는 날

몸과 함께 땅에 묻는 일이었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 받음. 1969년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아우내의 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등과 시극 『구운몽』, 『도미』 및 수필집  『당당한 여자』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