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송연숙 시인 / 실타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7.

송연숙 시인 / 실타래

 

 

식물들의 집착은 좁다

그 좁은 집착이

꽃을, 이파리를, 열매를 속인다

 

분갈이하려고 식물을 들어 올리면

하얀 뿌리들이 화분 모양으로 얽히고설켜 한 덩어리다

실타래 같은 뿌리의 한 생이란

속이고 또 속는 일이다

 

실의 끝을 물고 들어간 미로에서

화분은 이동하는 계절

반려(伴侶)하는 계절이다

 

공중에 뿌리를 들어 올리고

돌돌 감긴 제자리걸음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고작, 조금 더 큰 계절로 계절을 옮겨주는 것

손바닥이 빨간 목장갑의 손금에서

흙을 털어 내는 것

나비가 없는 세상을 창가로 옮겨주고

어느 언덕쯤이라고

시냇물이 흐르는 양지쪽이라고

식물을 속이고

괜찮다, 괜찮다

꽃 피우라 독촉한다

 

이름을 많이 소유한 사람일수록

비좁은 사람일 것이다

뿌리가 뿌리의 발목을 감듯

잔뿌리 자르고 분갈이하듯

한 이름이 수많은 이름을 버리고 떠나갔다

작고 따뜻한 화(火)분에 담겨서

 

월간 『모던포엠』 2019년 9월호 발표

 

 


 

 

송연숙 시인 / 푸들푸들

 

 

아이들을 따라 불안한 눈빛 하나가

학교에 왔다

며칠째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저 곱슬은 어쩌다 주인을 잃어 버렸을까

아니면 버려졌을까

 

아직 주인을 알아볼 줄 몰라서

누구든 졸졸 따라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주인을 청하는 것이다

사람을 따라가다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재 빨리 사람을 바꾼다

하루 종일 쉼 없이 뛰어다녀 보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

주인은 없다

 

앞발을 들어 올리며 푸들푸들

허겁지겁 물그릇이 푸들푸들

책상 아래 방석에서 낑낑대는 잠을 청하며

푸들, 푸들

 

길을 잃고

버려지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여

 

빗줄기는 푸들푸들 내리고

털 비린내 나는 오후에도 주인은 없다

웅크린 잠이 주인,

아직 젖지 않은 보송보송한

방석 한 장이 저 개의 주인이다

 

계간 『에술가』 2019년 가을호 발표

 

 


 

 

송연숙 시인 / 측백나무 울타리

 

 

누가 아무도 없는 벌판에

측백나무 울타리 세워놓았나

안쪽도 바깥도 없는 그 울타리 드나들며

나는 안쪽에서 바깥을, 또 바깥에서

안쪽을 넘겨보거나 내다보곤 했다

또 아주 오래전 허물어진 옛집을 수습해서

울타리에 기대 놓았다

그럴 때면 앞마당과 뒤란이

저희들끼리 순서를 정하곤 하였다

 

집을 품지 않은 울타리는 울타리가 아니어서 벌판에서 벌판으로 몇 천리 가면 기차가 떠나는 간이역이 있고 또 어느 쪽으로 몇 시간 동안 그 기차를 타고 가면 어리둥절한 양떼들이 있다 양들에게 측백나무 울타리에 관해 물으면 예전 자신들이 구름의 일족으로 흘러 다닐 때 언뜻 본 것도 같다는 말을 하였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오래전에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운다

거미는 아침이슬로 기둥도 세우고 처마도 만드는데

머리가 먼저 이슬에 들어가 집을 짓는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둥근 배마저 이슬의 방을 하나씩 차지한다

 

안쪽도 바깥쪽도 없는 집

순서도 모서리도 신음도 만들지 않는 집

측백나무 울타리엔

거울 하나 둥실 매달려 있다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송연숙 시인

2016년 월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상 당선. 시집으로 『측백나무 울타리』(시와표현, 2019)가 있음. 현재 『시와 표현』 편집장,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