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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낙봉 시인 / 시답잖은/시답지 않은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7.

이낙봉 시인 / 시답잖은/시답지 않은

ㅡ 구멍

 

 

밤나무 그늘 아래로 120명의 여자가 지나간다, 120분 동안 120명의 여자를 본다,

 

기억의 끝은 휘어진 골목으로 사라진다, 어려운 일이지만 참아보려고 노력하는데 하늘은 늘 푸른 것도 아니다,

 

발밑에 난 구멍을 본다, 수많은 구멍을 본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멍들, 부지런히 구멍을 드나드는 개미들을 본다,

 

구멍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차고 넘치는 빗물,

 

살아갈 날보다 지난날이 더 생각나는 요즈음, 구멍 안에 있자니 죽을 것 같고 구멍 밖에 있자니 미칠 것 같아 서둘러 구멍을 지운다,

 

계간『시와 세계』2019년 가을호 발표

 

 


 

이낙봉 시인

1956년 춘천에서 출생. 198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내 아랫도리를 환히 밝히는 달』, 『돌 속의 바다』, 『다시 하얀 방』, 『미안해 서정아』, 『폭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