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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희 시인 / 청산별곡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6.

고정희 시인 / 청산별곡

 

 

해야 뜨지 마라 해야 뜨지 마라

동해 불끈 쥔 둥근 해야 뜨지 마라

니 떠올라 천지에 빛 환하면

죄 많은 우리 삶 어이해

한 많은 우리 땅 어이해

설움 많은 우리 지붕 어이해

부끄럽다 둥근 해야 서럽다 둥근 해야

이 땅에 이 어둠 한오백 년 푹 익고 나면

니 없이 못 사는 법 알고 또 알리니

해야 그때사 돋아오르거나

구천에나 갔던 듯 솟아오르거라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팔레스티나의 영가

 

 

하늘문이 열렸는데 다 어디 갔는가

 

동구 밖 허공을 찌르는 호곡 소리

 

하늘문 열었는데 다 어디 갔는가

 

기고만장한 엄동설한 속에서

 

뽕나무숲을 후리던 바람이여

 

어머니와 어버지의 옷을 벗기고

 

형제들의 알몸을 매질하던 채찍이여

 

거미줄만 무성한 폐옥의 마당에서

 

서쪽을 향하여 때아닌 올리브꽃이 시들고

 

우리들의 지적인 밥사발을 마주하여

 

늙은이가 젊은이의 시체를 매장하는

 

이 거대한 해골 골짜기에

 

하늘문 열었는데 다 어디 갔는가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풀무질 노래

 

 

검푸른 하늘 하늘로 하늘로

꿈얼레 등에 업고 날아 오른 독수리

그 독수리도 사라진 가을 저녁에

친구여 불운한 꿈의 불씨 다둑여

빈 들녘에 장작을 괸다

빈 가슴에 쑥불을 놓는다

 

떠난 바다 돌아올 것 같은 저녁에

날아가 버린 독수리 하늘 가득

차오를 것 같은 저녁에 친구여

심중 깊은 말[言] 쏟아

숯불 괄게 지핀다

 

아직은 캄캄한 밀림의 미로에서

누가 벌목을 두려워하랴만

들을 횡단하는 암캉아지를 보며

누가 순결을 믿어주랴만

(백발백중 명중의 화살 한 다발

인연의 곳간에 비축해야 하리라)

 

만개한 숯불에 무딘 쇠붙이 꽂고

무막한 뜨거움 달아오를 동안

친구여, 비장의 망치 하나

이슬에 젖어 있다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6. 9】 시인

본명은 성애.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