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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정희 시인 / 바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8.

문정희 시인 / 바위

 

 

푸른 물로 `너는 내 지귀다' 찍어 놓은

아차산 애기중 자효스님은

새벽마다 호올로 피리 불었다.

피리 소리 청보리로 푸르러서

앞 밭의 나는 날마다 출렁였다.

 

자효는 흰 찻종지 향내음 담아

두 손으로 바쳤다.

출렁이는 마음 연잎 숟갈로 저어 바쳤다.

`참 향기로와요'

자효는 색실 같은 그말에 그만 걸려 넘어져

연잎도 아낌없이 나에게 바쳤다.

 

새들도 꽃송이로 날으는

첫눈 오는 날

백팔 번 기운 누더기 하나

문 밖에 서 있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백팔 번 기운 누더기 실땀마다 피가 돌아서

자효 몸은 대낮같이 빛이 솟았다.

겨울나무로 세워 놓고 나는 그 가사 벗겨 가졌다.

 

피리도 연잎도 가사도 없는

천둥 벌거숭이 봄이 왔다.

아차산 뜨락엔 정적이 내렸다.

정적이 싹들을 틔우기 시작했다.

 

큰스님 말씀처럼 꺼덕않는

부도 하나 절마당에 누워서 하늘 보았다.

`이 바위 참 편하겠네요. 내가 가져가고 싶어요.'

나는 바위어깨 쓰다듬으며 지귀를 쏘아보았다.

이때 문득 터지는 뇌성!

`그 욕심이나 여기다 부리고 가세요'

그리고 날 집어서 바위 위에 내동댕이치고

자효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천년이 흘렀다.

눈 하나 깜박이는 찰나였다.

 

가시 빠져버린 황혼의 나는 오늘

그 옛날 부려 놓고 온 욕심을 만나러 간다.

 

석태는 조금 끼었지만

지금도 꺼덕않는

천년의 욕심.

 

찔레, 전예원, 1987

 

 


 

 

문정희 시인 / 불면(不眠)

 

 

사막을 걸었다.

 

흐르는 모래 위의

달빛에 감기어

끈끈한 비밀들이

몸 비비는 소리.

 

더러는 하얀빛을

지우지 못하여

지금 모든 뜰의

꽃잎들은 흔들리고 있다.

 

내가 때묻은 만큼

빛나는 손톱 끝에서

바람이 변하여

비가 내리고

 

벗어나지 못하는

슬픈 둘레

 

그 사이에 끼인

뜨거운 하늘을 이고

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새떼, 민학사, 1975

 

 


 

 

문정희 시인 /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부제: 투옥당한 패장(敗將)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男根)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는 끌 수 없는

제 눈속의 불

천년 역사에다 당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찔레, 전예원, 1987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 받음. 1969년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아우내의 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등과 시극 『구운몽』, 『도미』 및 수필집  『당당한 여자』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