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마종기 시인 / 권총을 사 들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8.

마종기 시인 / 권총을 사 들고

 

 

어둡고 긴 숲에서 밀리고 넘어지면서

한 세월을 털어 보내고 난 후

권총 한 자루를 사 들고

초연한 서부의 무법자처럼

차가운 총신(銃身)을 닦아내면서

한 마디로 꺾는 연습을 하면서.

 

6발의 총알을 장전하고

숨소리 죽이면서 침대 밑에 밀어 넣고

높고 견고한 성(城)을 매일 밤 마음에 쌓고

밤새도록 명중하는 총소리에 핏발을 세우고.

 

아침에는 서부의 바람이 서쪽으로 불면

오후에는 같은 바람이 동쪽으로 불고

저녁의 사격장에는 흔들리는 석양뿐,

우리가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이

감은 눈에 희미하게 잠시 보일 뿐,

우리들 인연이야 어차피 바람이고

내가 조준할 것은 이 세상에 없었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 그 나라 하늘빛

 

 

  1

 

  그 나라 하늘빛은 만길 폭이겠지.

  어깨 감싸주던 하늘빛 어디 다 감추고

  매연과 소음과 유흥판이 철철이

  나라의 마음을 잿빛으로 덮고 있더니.

  그러나 나라의 뜻은 큰 도시만이 아니더군.

  내가 길들여진 앳되고 순진한 하늘들은

  시골 마당 어느 촌에서도 아직 편안히 보이고

  반가운 얼굴들 곳곳에 숨어 살고 있더군.

  산채나물 안주삼아 마신 남도의 좋은 술,

  다음날 눈부시게 보이던 고운 하늘 얼굴.

  고마워라, 그 빛깔 내 눈물줄에 심어놓았다.

  아지랑이 잠재우고 느슨히 일어서는 하늘

  남도 쪽 긴 노래가 천길 산골에 내리데.

 

   2

 

  `고국에 묻히고 싶다'―교포 신문의 큰 제목

  병고에 시달리는 재미 교포 노인의 호소

  그러나 노인은 고국의 땅값을 잊은 모양이지.

  수십 년 노동으로 사놓은 때절은 그 집 팔아도

  고국의 땅을 몇 평이나 살까, 몸이나 눕힐까.

  쓸데없는 욕심입니다―신문 던져버렸는데

  며칠째 그 노인의 누운 사진이 눈에 번진다.

 

  ―그렇다면 좀 자세히 들어보세요.

  시체를 고국에 운반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시체 출국 수속 절차도 아주 복잡하답니다.

  묘지값 비싼 것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뿐인가, 재산 털어 설사 고국땅에 묻혀도

  어디서 왔느냐고 죽어서도 발길질당할지.

  정 돌아가시겠다면 유골로 가는 게 어떠세요.

 

  ―자네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군.

  나는 고국의 비싼 땅에 묻히려는 게 아니고

  그 나라 푸른 하늘 속에 묻히고 싶다는 말일세.

  고국에 비가 오면 나도 같이 젖어서 놀고

  비 그치고 무지개 피면 나도 무지개를 타겠지

  그 나라 하늘빛에 묻히고 싶다는 말일세.

  또 언젠가 깨어나서 그 하늘 한쪽이 된다면

  고국의 산천은 언제나 눈앞에 서 있지 않겠는가.

  더 이상 사무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참, 선생은 그 나라 하늘빛을 아시는가.

 

  3

 

  이제는 가끔 혼자 가는 꿈에서도

  이상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네.

  땅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빛,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들의 길.

  눈부신 그 빛들 서로 만나서

  갑자기 놀라고 반기는 표정도.

 

  루르드나 파티마의 서양 처녀들이 본

  그 나라 하늘빛은 기다려주겠지.

  그 빛 속에서 깊은 말 들린다는 것

  내 귀가 문을 열면 알아들을까.

 

  한 나라의 슬픔도 문을 열면 들린다.

  한 사람의 사랑도 문을 열면 보인다.

  우리들의 부끄럽고 아득한 길을 다 열면

  그 길 끝나는 곳에서 그 나라의 하늘빛이.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그림 그리기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다.

겨울같이 단순해지기로 했다.

창 밖의 나무는 잠이 들고

형상(形象)의 눈은

헤매는 자의 뼈 속에 쌓인다.

 

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빈 들판같이 살기로 했다.

남아있던 것은 모두 썩어서

목마른 자의 술이 되게 하고

자라지 않는 사랑의 풀을 위해

어둡고 긴 내면(內面)의 길을

핥기 시작했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 그림 그리기 4

 

 

  1

 

  한 그루 나무를 그린다. 외롭겠지만

  마침내 혼자 살기로 결심한 나무.

  지난 여름은 시끄러웠다. 이제는

  몇 개의 빈 새집을 장식처럼 매달고

  이해 없는 빗소리에 귀기울이는 나무.

  어둠 속에서는 아직도 뜬소문처럼

  사방의 새들이 날아가고, 유혹이여.

  눈물 그치지 않는 한 세상의 유혹이여.

 

  2

 

  요즈음에는 내 나이 또래의 나무에게

  관심이 많이 간다.

  큰 가지가 잘려도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고

  잠시 눈을 주는 산간의 바람도

  지나간 후에야 가슴이 서늘해온다.

  인연의 나뭇잎 모두 날리고 난 후

  반백색 그 높은 가지 끝으로

  소리치며 소리치며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그림 그리기 5

 

 

그리던 나무를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혼자서 멀리 떠나야만

길고 편한 잠 이룰 수 있는 것 알면서

땅에 떨어지기 싫어하는

낙엽이 있다면 어쩌겠냐.

 

바람은 밤낮으로 거칠게 불어대고

겨울이 되기 전에 땅이 되어야 하는

약속의 시간을 어긴다면 어쩌겠냐.

언제 우리 마음을 완전히 풀어놓고

언제 인연의 수갑을 두 팔에서 풀어놓고

정신없이 밀린 잠을 잘 수 있으랴.

 

마지막 날의 그림을 그린다.

마무리하던 나무를 지우고, 그 위에

모든 색깔을 다 지우고,

짧고 간단한 향기를 그린다.

 

편안하다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나무 옆에 서 있는 향기가 되겠지.

여기 있다고 말할 것도 없고

생각도 없이, 만질 것도 없이

밤낮으로 보고만 있으면 편안하지 않겠냐.

 

지나간 날들의 많은 영혼이 돌아오면

우리들의 빈집을 그냥 내어주고

가방 가득히 들고 다니던 사랑도

우리들 긴 잠 속에 놓고 오면 되겠지.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2

 

 


 

 마종기 시인

1939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연세대 의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월간 『현대문학』 1959년 1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발표 이후 3회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凱旋)』, 『두번째 겨울』, 『변경(邊境)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등의 시집과 공동 시집 『평균율』Ⅰ·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