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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정원 시인 / 벙커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8.

한정원 시인 / 벙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어둠이 지나갔다

 

어둠의 보폭은 한 뼘, 두 뼘 조금씩 환해지는 것

벽을 짚고 헤드폰을 쓰고

우리는 흙의 자세로 바닥에 누워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

 

비밀이 있던 자리에 빛을 침투시키면

백 개의 물이 금빛으로 흘러갔다

 

흑연을 껴안고 서있는 시간의 기둥

지우개밥보다 가볍게 흩어지는 죽은 약속의 입자들

사과 꽃은 벽 속에서 말문이 트였다

 

옹알이에서 나온 첫 말, 눈부셔

캄캄한 에코로 집을 지으며 빗소리도 들었지만

곤충도 절지동물도 자라지 않았다

 

천장은 낮고 전깃줄은 스물두 개

입구와 출구를 찾는 법은 햇빛 냄새를 따라가는 것

 

녹슨 자물쇠를 더듬으며 나비를 풀어주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를 밟으며

우리는 새벽까지 수맥을 따라갔다

바닥은 빛을 다 드러냈다

 

계간『신생』2019년 여름호 발표

 

 


 

한정원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교와 세종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졸업.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시와시학사, 2003)『낮잠 속의 롤러코스터』(시평사, 2005), 『마마 아프리카』(현대시학,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