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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일요일의 미학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6.

김현승 시인 / 일요일의 미학

 

 

노동은 휴식을 위하여

싸움은 자유를 위하여 있었듯이,

그렇게 일요일은 우리에게 온다.

아침빵은 따뜻한 국을 위하여

구워졌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즐겁듯이,

일요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집에 온다.

오월은 푸른 수풀 속에

빨간 들장미를 떨어뜨리고 갔듯이.

 

나는 넥타이를 조금 왼쪽으로 비스듬히 매면서,

나는 음부(音符)에다 불협화음을 간혹 섞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 상사(上司)에게도 미안치 않은

늦잠을 조을면서,

나는 사는 것에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이레만에 편히 쉬던 신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남이던 내가,

채찍을 들고 명령하고

날카로운 호루라기를 불고

까다로운 일직선을 긋는 남이던 내가,

오늘은 아침부터 내가 되어 나를 갖는다.

 

내가 남이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요일을 가진 내 나라―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나는 언제나 아름다워한다.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자화상

 

 

내 목이 가늘어 회의에 기울기 좋고

혈액은 철분이 셋에 눈물이 일곱이기

포효보담 술을 마시는 나이팅게일……

 

마흔이 넘은 그보다도

쪼이 쪼들어

연애엔 아주 실망(失望)이고,

 

눈이 커서 눈이 서러워,

모질고 싸특하진 않으나,

신앙과 이웃들에 자뭇 길들기 어려운 나―.

 

사랑이고 원수고 몰아쳐 허허 웃어 버리는

비만한 모가지일 수 없는 나―.

 

내가 죽는 내

단테의 연옥에선 어는 선문(扇門)이 열리려나.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재

 

 

나는 나의 재로

나의 모든 허물을 덮는다.

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나는 한 줌의 재로 덮고 간다.

 

그러나 까마귀여,

녹슨 칼의 소리로 울어 다오.

바람에 날리는 나의 재를

울어 다오.

 

나의 허물마저 덮어 주지 못하는

내 한 줌의 재를

까마귀여,

 

모든 빛깔에 지친

너의 검은빛―통일의 빛으로

울어 다오.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전환

 

 

이제는

밝음의 이쪽보다

나는 어둠의 저쪽에다

귀를 기울인다.

 

여기서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어둠의 저쪽에다 내 귀를 모두어 세운다.

이제는 눈을 감고

 

어렴풋이나마 들려 오는 저 소리에

리듬을 맞춰 시도 쓴다.

이제는 떨어지는 꽃잎보다

고요히 묻히는 씨를

내 오랜 손바닥으로 받는다.

 

될 수만 있으면

씨 속에 묻힌 까마득한 약속까지도……

그리하여 아득한 시간에까지도 이제는

내 웃음을 보낸다,

순간들 사이에나 떨어뜨리던 내 웃음을

이제는 어둠의 저편

보이지 않는 시간에까지

모닥불 연기처럼 살리며 살리며……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절대 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내고 만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와 함께.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