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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사월의 노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5.

노천명 시인 / 사월의 노래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라일락 아래로

 

푸른 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픈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랑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열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러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굴의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산염불(山念佛)

 

 

산염불소리 꺾이어 넘어가면

커―단히 떠오르는 얼굴 있어

우정 산염불 틀어 놓고는

우는 밤이 있어라

 

비인 주머니하고 풀 없이 다니던 일

쩌릿하니 가슴에다 못을 친다

지금쯤 어늬

쥐도 새끼를 안 친다는 그 땅광에서

남쪽 한늘 그리며

큰눈 꺼벅이고 있는지

겁먹은 눈을 뜬 채 또 쓰러져 버렸는지―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소녀

 

 

`어디를 가십니까'

노타이 청년의 평범한 인사에도

포도주처럼 흥분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머지 않아 아가씨 가슴에도

누가 산도야지를 놓겠구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수수 깜부기

 

 

깜부기는 비가 온 뒤라야 잘 팼다

아이들이 깜부기를 찔러

참새떼처럼 수수밭으로들 밀려갔다

 

밭고랑에 가 들어서

꼭대기를 쳐다보다

 

희끗 깜부기를 찾아내는 때는

수숫대는 사정없이 휘며 숙여졌다

 

깜부기를 먹고 난 입은

까암해 자랑스러웠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