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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아침 식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4.

김현승 시인 / 아침 식사

 

 

내 아침상 위에

빵이 한 덩이,

물 한 잔.

 

가난으로도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신 주(主)여.

 

겨울의 마른 잎새

한끝을,

당신의 가지 위에 남겨 두신

주(主)여.

 

주(主)여,

이 맑은 아침

내 마른 떡 위에 손을 얹으시는

고요한 햇살이시여.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어린 것들

 

 

너희들의 이름으로

너희들은 허물할 것이 없다.

 

너희들의 아름다움은

그 측은한 머리와 두려워하는 눈동자,

연약한 팔목과 의지함에 있다.

 

너희들의 귀여움은,

대숲에서 자고 나오는 아침 참새들처럼

재재거리는 그 소리와,

이유 없는 기쁨과 너희들이 깎는 연필심과 같이

까아만 너희들의 눈동자에 있다.

 

너희들이 슬프게도 아아 슬프게도

달리는 흉기 그 앞바퀴에 깔려

너희의 고사리 같은 손을 아스팔트에 던지고

쓰러졌을 때,

나는 너희들의 이름이 애끊는 이름이

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나는 아무래도 천국으로 갈 수는 없겠다!

 

너희들은 햇빛을 햇빛이라 부르고

서슴지 않고 배고픔을 배고픔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너희들의 깨끗한 한국어는

가장 강한 노래의 샘물이 된다.

 

빈틈 없는 어른들의 교훈보다

어설픈 너희들의 이상한 꿈과 말의 지껄임,

그 처음의 생명 속에서

너희들은 종교보다 한 걸음 앞서서

언제나 이 세상에 태어난다.

 

煞灼Ñ 고독, 관동출판사, 1968

 

 


 

 

김현승 시인 / 영혼의 고요한 밤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내 영혼의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스치는……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내 육신의 높은 언덕 그 위에 서서

얄리얄리 보리 피리 불어주던……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누구의 감는 갈피엔가

뉘우치며 되새기며 단풍잎 접어 넣는……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낙엽보다 쓸쓸한 쓰르라미 울음소리

내 메마른 영혼의 가지에 붙어 우는……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책상 위에 고요히 턱을 고이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버린 다 읽어 버린……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옹호자의 노래

 

 

말할 수 없는 모든 언어가

노래할 수 있는 모든 선택된 사조(詞藻)가

소통할 수 있는 모든 침묵들이

고갈하는 날,

나는 노래하련다!

 

모든 우리의 무형한 것들이 허물어지는 날

모든 그윽한 꽃향기들이 해체되는 날

모든 신앙들이 입증(立證)의 칼날 위에 서는 날,

나는 옹호자들을 노래하련다!

 

티끌과 상식으로 충만한 거리여,

수량(數量)의 허다한 신뢰자들이여,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는 길을

모든 사람들이 결론에 이르는 길을

바꾸어 나는 새삼 떠나련다!

 

아로새긴 상아와 유한의 층계로는 미치지 못할

구름의 사다리로, 구름의 사다리로,

보다 광활한 영역을 나는 가련다!

싸늘한 증류수의 시대여,

나는 나의 우울한 혈액 순환을 노래하지 아니치 못하련다.

 

날마다 날마다 아름다운 항거의 고요한 흐름 속에서

모든 약동하는 것들의 선율처럼

모든 전진하는 것들의 수레바퀴처럼

나와 같이 노래할 옹호자들이여,

나의 동지여, 오오, 나의 진실한 친구여!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우수(憂愁)

 

 

가을이 긴 나라

그 나라의 저녁참은

까닭없이 바람 속에 설레이고,

 

가을이 긴 나라

그 나라의 여인들은

수심 깊은 눈망울에 저녁 해를 받고 있다.

 

가을이 긴 나라

그 나라의 정든 마음

 

길고 긴 한을 남겨 잠잠히 이어 보내고

 

가을이 긴 나라,

그 나라의 늦은 새들

해지는 먼 땅끝까지 쭉지로 울고 간다.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