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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용래 시인 / 탁배기(濁盃器)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4.

박용래 시인 / 탁배기(濁盃器)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굴렁쇠 아이들의 달.

자치기 아이들의 달.

땅뺏기 아이들의 달.

공깃돌 아이들의 달.

개똥벌레 아이들의 달.

갈래머리 아이들의 달.

달아, 달아

어느덧

반백(半白)이 된 달아.

수염이 까슬한 달아.

탁배기(濁盃器) 속 달아.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하관(下棺)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뒹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하관(下棺)

선상(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학(鶴)의 낙루(落淚)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일년 열두달 머뭇머뭇 골목을 누비며

삼백 예순날 머뭇머뭇 집집을 누비며

오오, 안스러운 시대(時代)의

마른 학(鶴)의 낙루(落淚)

 

슬픔은 모른다는 듯

기쁨은 모른다는 듯

구름 밖을 솟구쳐 날고

날다가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시인 / 한식(寒食)

 

 

계곡(溪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철쭉꽃 홀로 듣고 있다

 

계곡(溪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부엉새 홀로 듣고 있다

 

계곡(溪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나그네 홀로 듣고 있다

 

계곡(溪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계곡(溪谷)이 홀로 듣고 있다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시인 / 할매

 

 

손톱 발톱

하나만

깎고

연지 곤지

하나만

찍고

할매

안개 같은

울 할매

보리잠자리

밀잠자리 날개

옷 입고

풀줄기에

말려

늪가에

앉은

꽃의

그림자

같은 메꽃.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해바라기 단장(斷章)

 

 

해바라기 꽃판을

 

응시한다

 

삼베올로

 

삼베올로 꽃판에

 

잡히는 허망(虛妄)의

 

물집을 응시한다

 

한 잔(盞)

 

백주(白酒)에

 

무우오라기를

 

씹으며

 

세계(世界)의 끝까지

 

보일 듯한 날.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朴龍來, 1925.8.14~1980.11.21] 시인

1925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강경 상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중』(1980) 등과 시전집 『먼바다』(1984)가 있음. 1961년 제5회 충남문학상과 1969년 시집 『싸락눈』으로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과 1980년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