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동경
내 마음은 늘 타고 있소 무엇을 향해선가―
아득한 곳에 손을 휘저어 보오 발과 손이 매여 있음도 잊고 나는 숨가삐 허덕여 보오
일찍이 그는 피리를 불었소 피리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나는 몰라 예서 난다지…… 제서 난다지……
어디엔지 내가 갈 수 있는 곳인지도 몰라 허나 아득한 저곳에 무엇이 있는 것만 같애 내 마음은 그칠 줄 모르고 타고 또 타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동기(同氣)
언니와 밤을 밝히던 새벽은 `성사(聖赦)'를 받는 것 같다 내 야윈 뺨엔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이 뜨거워― 언니가 보고지워 떠나가는 날은 천릿길을 주름잡아 먼 줄을 몰라
감나무 집집이 빠알간 남쪽 말들이 거세어 이방(異邦)도 같건만 언니가 산대서 그곳은 늘상 마음에 그리운 곳―
오늘도 남쪽에서 온 기인 편지 읽고 읽으면 구슬픈 사연들 `불이나 뜨뜻이 때고 있는지 외따로 너를 혼자 두고 바람에 유리문들이 우는 밤엔 잠이 안 온다'
두루마지를 잡은 채 눈물이 피잉 돌았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만가(輓歌)
일찍이 걷던 거리엔 그날처럼 사슴이 오고…가고… 모퉁이 약국집 새장의 라빈도 우는데― 이 거리로 오늘은 상여(喪輿)가 한 채 지나갑니다
요령을 흔들며 조용히 지나는 덴 낯익은 거리들…… 엄숙히 드리운 검은 포장 속엔 벌써 시체 된 그대가 냄새납니다
그대 상여 머리에 옛날을 기념하려 흰 장미와 백합을 가드윽히 얹어 향기로 내 이제 그대의 추기를 고이 싸려 하오
산호림, 자가본,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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