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그대 말을 타고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날이 이제 새나 봅니다
천년 같은 기인 밤이었습니다
고독과 어두움이 나를 두르고 모진 바람 채찍모양 내게 감겨들었건만 그대를 기다리며 이 밤을 참았나이다 그대 얼굴은 나의 태양이었나니
외로움에 몸부림치면 커어다란 얼굴 해 주고 밖에서 마음 얼어 들어오면 녹여 주고 한밤중 눈물 지면 씻어 주었습니다
어늬 객주집 마구간 말의 눈엔 새벽달이 비치고 곡마단 계집아이들도 잠이 들었을 무렵 그대를 기다리는 내 기도가 올려졌나이다
이제사 오시렵니까 하마 저제나 오시렵니까 당신의 말굽 소리 듣는다면 담박에 내가 십 년은 젊어지겠나이다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꽃길을 걸어서
그 겨울이 다 가고 산에 갔던 아이들 손엔 할미꽃이 들려졌다 사립문에 기대어 서서 진달래 자욱한 앞산을 바라보면 큰애기의 가슴은 파도모양 부풀어올랐다 사월 큰애기의 꿈은 무지개같이 찬란했다
웬일인지 이 봄엔 삼팔선이 터지고 나갔던 그이가 돌아올 것만 같다 `갔다 오리다' 생생하게 지금도 귀에 들린다 군복을 입은 모습 어찌 그리 늠름하고 더 잘나 보였을꼬
그이가 일선으로 나간 뒤부터 뉴―쓰 영화의 군인들이 모두 다 그이 같아 반가워졌다
주여 이 봄엔 통일을 꼭 가져다 주소서 그리하여 진달래 곱게 핀 꽃길을 걸어서 승전한 그이가 돌아오게 해 주소서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돌아오는 길
차마 못 봐 돌아서 오며 듣는 기차 소리는 한나절 산골의 당나귀 울음보다 더 처량했다
포도 위에 소리 없이 밤안개가 어린다 마음 속엔 고삐 놓은 슬픔이 딩군다
먼―한길에 걸음이 안 걸려 몸은 땅 속에 잦아들 것만 같구나
거리의 플라타너스도 눈물겨운 밤 일부러 육조(六曹) 앞 먼 길로 돌았다
길바닥엔 장미꽃이 피었다―사라졌다―다시 핀다 해저(海底)의 소리를 누가 들은 적이 있다더냐
산호림, 자가본,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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