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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그대 말을 타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2.

노천명 시인 / 그대 말을 타고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날이 이제 새나 봅니다

 

천년 같은 기인 밤이었습니다

 

고독과 어두움이 나를 두르고

모진 바람 채찍모양 내게 감겨들었건만

그대를 기다리며 이 밤을 참았나이다

그대 얼굴은 나의 태양이었나니

 

외로움에 몸부림치면

커어다란 얼굴 해 주고

밖에서 마음 얼어 들어오면 녹여 주고

한밤중 눈물 지면 씻어 주었습니다

 

어늬 객주집 마구간

말의 눈엔 새벽달이 비치고

곡마단 계집아이들도 잠이 들었을 무렵

그대를 기다리는 내 기도가 올려졌나이다

 

이제사 오시렵니까 하마 저제나 오시렵니까

당신의 말굽 소리 듣는다면

담박에 내가 십 년은 젊어지겠나이다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꽃길을 걸어서

 

 

그 겨울이 다 가고

산에 갔던 아이들 손엔 할미꽃이 들려졌다

사립문에 기대어 서서

진달래 자욱한 앞산을 바라보면

큰애기의 가슴은 파도모양 부풀어올랐다

사월 큰애기의 꿈은 무지개같이 찬란했다

 

웬일인지 이 봄엔 삼팔선이 터지고

나갔던 그이가 돌아올 것만 같다

`갔다 오리다'

생생하게 지금도 귀에 들린다

군복을 입은 모습

어찌 그리 늠름하고 더 잘나 보였을꼬

 

그이가 일선으로 나간 뒤부터

뉴―쓰 영화의 군인들이 모두 다

그이 같아 반가워졌다

 

주여

이 봄엔 통일을 꼭 가져다 주소서

그리하여

진달래 곱게 핀 꽃길을 걸어서

승전한 그이가 돌아오게 해 주소서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돌아오는 길

 

 

차마 못 봐 돌아서 오며 듣는 기차 소리는

한나절 산골의 당나귀 울음보다 더 처량했다

 

포도 위에 소리 없이 밤안개가 어린다

마음 속엔 고삐 놓은 슬픔이 딩군다

 

먼―한길에 걸음이 안 걸려

몸은 땅 속에 잦아들 것만 같구나

 

거리의 플라타너스도 눈물겨운 밤

일부러 육조(六曹) 앞 먼 길로 돌았다

 

길바닥엔 장미꽃이 피었다―사라졌다―다시 핀다

해저(海底)의 소리를 누가 들은 적이 있다더냐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