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새해 인사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굴러라.
건너 뛰듯 건너 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굴러라 발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샘물
깊고 어진 사람의 성품과 같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풍성히 솟는 샘물…… 몇천 몇만년 얼마나 많은 길손들이 저들의 무거운 멍에를 이 샘물 곁에 쉬고 갔을까.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오고 올 사람들이 저들의 피곤한 다리와 메마른 입술 저들의 평생을 이 샘물에 적시우고 가려는가?
깊은 밤이 지새고 먼동이 트이면 서로이 낯익은 아낙네들이 이 샘물에 모여 넘치도록 가득히 긷는 질동이의 물들은 정녕 은이나 금보다 훨한 것은 아니언만, 그러나 아낙네들은 금은보화를 나를 때와 같이 서둘거나 다투지도 않는다.
그 마음이 날로 새로워 항상 아름다운 꿈을 지니이듯 억만 년 이 정결한 품속에서 씻기운 푸른 하늘을 저만이 호올로 간직한 보배처럼 때때로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가는 흰 구름들도 있다! 구름들이 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풍성하게 솟아 넘치는 샘물이기에 오히려 그의 은총을 지나쳐 버리는 우리의 허물은 허물이어도 오히려 아름다운 우리의 크낙한 행복이다! 행복이다.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선을 그으며
내가 긋는 선(線)은 아무리 가느다라도 넓이는 그냥 남는다.
네가 가는 칼날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무게는 아직도 남는다.
그렇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끝났는데 사랑은 어찌하여 머뭇거리고 마음 한구석 어딘가 바늘구멍으로 나는 눈물을 흘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밤이 오는데 별은 빛나고, 장미는 네 밝은 웃음 그 한복판에 벌레를 재운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 온전이란 국어 가운데 국어일 뿐, 우리는 선(線)을 긋기는 하여도 우리는 선(線)의 정의(定義)를 긋지는 못한다. 나의 착한 친구들이여.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슬픔
슬픔은 나를 어리게 한다.
슬픔은 죄를 모른다, 사랑하는 시간보다도 오히려,
슬픔은 내가 나를 안는다,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슬픔은 나를 목욕시켜 준다, 나를 다시 한 번 깨끗게 하여 준다.
슬픈 눈에는 그 영혼이 비추인다. 고요한 밤에는 먼 나라의 말소리도 들리듯이.
슬픔 안에 있으면 나는 바르다!
신앙이 무엇인가 나는 아직 모르지만, 슬픔이 오고 나면 풀밭과 같이 부푸는 어딘가 나의 영혼……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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