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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새해 인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2.

김현승 시인 / 새해 인사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굴러라.

 

건너 뛰듯

건너 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굴러라 발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샘물

 

 

깊고 어진 사람의 성품과 같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풍성히 솟는 샘물……

몇천 몇만년 얼마나 많은 길손들이

저들의 무거운 멍에를 이 샘물 곁에

쉬고 갔을까.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오고 올 사람들이

저들의 피곤한 다리와 메마른 입술

저들의 평생을

이 샘물에 적시우고 가려는가?

 

깊은 밤이 지새고

먼동이 트이면

서로이 낯익은 아낙네들이 이 샘물에 모여

넘치도록 가득히 긷는 질동이의 물들은

정녕 은이나 금보다 훨한 것은 아니언만,

그러나 아낙네들은

금은보화를 나를 때와 같이

서둘거나 다투지도 않는다.

 

그 마음이 날로 새로워

항상 아름다운 꿈을 지니이듯

억만 년 이 정결한 품속에서 씻기운 푸른 하늘을

저만이 호올로 간직한 보배처럼

때때로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가는

흰 구름들도 있다! 구름들이 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풍성하게 솟아 넘치는 샘물이기에

오히려 그의 은총을 지나쳐 버리는 우리의 허물은

허물이어도 오히려 아름다운

우리의 크낙한 행복이다! 행복이다.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선을 그으며

 

 

내가 긋는 선(線)은

아무리 가느다라도

넓이는 그냥 남는다.

 

네가 가는 칼날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무게는 아직도 남는다.

 

그렇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끝났는데

사랑은 어찌하여 머뭇거리고

마음 한구석 어딘가 바늘구멍으로

나는 눈물을 흘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밤이 오는데

별은 빛나고,

장미는 네 밝은 웃음 그 한복판에

벌레를 재운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

온전이란

국어 가운데 국어일 뿐,

우리는 선(線)을 긋기는 하여도

우리는 선(線)의 정의(定義)를 긋지는 못한다.

나의 착한 친구들이여.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슬픔

 

 

슬픔은 나를

어리게 한다.

 

슬픔은

죄를 모른다,

사랑하는 시간보다도 오히려,

 

슬픔은 내가

나를 안는다,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슬픔은 나를

목욕시켜 준다,

나를 다시 한 번 깨끗게 하여 준다.

 

슬픈 눈에는

그 영혼이 비추인다.

고요한 밤에는

먼 나라의 말소리도 들리듯이.

 

슬픔 안에 있으면

나는 바르다!

 

신앙이 무엇인가 나는 아직 모르지만,

슬픔이 오고 나면

풀밭과 같이 부푸는

어딘가 나의 영혼……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