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산까마귀 울음소리
아무리 아름답게 지저귀어도 아무리 구슬프게 울어예어도 아침에서 저녁까지 모든 소리는 소리로만 끝나는데,
겨울 까마귀 찬 하늘에 너만은 말하며 울고 간다!
목에서 맺다 살에서 터지다 뼈에서 우려낸 말, 중에서도 재가 남은 말소리로 울고 간다.
저녁 하늘이 다 타버려도 내 사랑 하나 남김없이 너에게 고하지 못한 내 뼛속의 언어로 너는 울고 간다.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삼월생(三月生)
눈보라 입술이 더 고운 저 애는, 아마도 진달래 피는 삼월에 태어났을 거야.
삼월이 다하면 피는 튜우립들도 저애의 까아만 머리보다 더 귀엽지는 못할 거야
저애는 자라서 아마 어른이 된 후에도, 플라타너스 눈이 틀 때 타고난 그 마음씨는 하냥 부드러울 거야.
그렇지만 저 애도 삼월이 가고 구월이 가까우면 차츰 그 가슴이 뿌듯해 올 거야. 어금니처럼 빠끔이 터지는 그 여린 가슴이……
겨울은 가고 봄은 아직 오지 않는 야릇한 꿈에서 서성일지도 모를거야.
수선화 새순 같은 삼월생. 저 애는 돌맞이 앞니같이 맑은 삼월생.
煞灼Ñ 고독, 관동출판사, 1968
김현승 시인 / 새벽 교실
새벽의 밤의 밀림을 치는 그윽한 소리가 또다시 머언 사면에서 들려 옵니다. 까아만 남빛 유리밀림(琉璃密林) 속에 고요히 잠들었던 작은 별들은 그만 놀라 깨어 머얼리 날아가 버리느라고 아마 새벽마다 이렇게 잔잔한 바람이 이는 게지요!
우유(牛乳)를 짜는 것도 아니지만, 누구인가, 들의 여명을 밟으며 따뜻한 유방의 감촉을 등에 메고 들어와 여기 저기 아직도 등불을 내어버린 자욱한 거리 위에 하얀 밀크를 얹고 돌아가면 참새들은 이제 바쁜 듯이 떠돌며 점잖은 동상이 있는 곳으로 모이겠지요?
그러면 그렇지요. 고 얄미운 아우 같은 것들이 벌써 일어나 오늘 아침은 무엇인지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나봅니다그려. 야단들이에요. 밀월의 은빛 소낙비 퍼지던 어젯밤…… 다람쥐가 기다리는 붉은 골짜기도 잊어버리고 북극의 보초가 멀리 지평의 새벽을 기다리는 하늘에 대상(隊商)들의 발자욱과 떨어뜨린 손수건의 모양을 만들며 늦도록 놀다가 돌아간 작은 구름들의 태도가 도무지 옳으냐 옳지 않으냐, 이것이 그들의 제목인 줄 압니다. 아름다운 상선과 첨탑을 자랑할 수 있는 지방(脂肪)의 귀족들의 트렁크를 두루 찾던 장한(壯漢)들이 여호의 굴과 같은 쓸쓸한 마을의 초상을 안고 흩어지는 성읍(城邑)의 황혼이 오면 포도빛 지평선에 실려 돌아가기로 약속하고서 글쎄 얼마나 분하였겠어요.
그러나 재미있는 성품을 가진 구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넘어 오고 있습니다그려― 저걸 좀 보세요. 칠면조 웅변가 식인조― 모두 우습게 평화와 자유를 그러나 상징하고 있지 않습니까? 납작한 푸른 캡을 쓴 버스가 포플러의 정거장에 머무는 오후가 오면, 저 구름들은 고산식물과 먼 해협을 건너 식인조의 수림(藪林)을 찾아간다 합니다. 그러니, 참새들은 암만 바라보아야 누구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토론회는 어떻게 되었는지 군축회의같이 흩어져 버리는구먼.
유리창―금빛 태양이 물결치는 빌딩의 아침 해협을 열고 젊은 폐혈관(肺血管)들은 서재(書齋)의 탄산가스와 새벽을 우주로부터 바꿉니다. 폭탄과 같이 태양은 멀리 밤을 깨뜨립니다. 아아 여보세요. 새날의 승리를 안고― 아세아 또 지구의 들을 용맹스럽게 달릴 광명의 젊은 피더스여 어둡고 쓸쓸한 당신의 투숙―세기의 창을 열고 새날의 경륜과 구가로 우렁차게 돌파하는 새벽을 바라보지 않으렵니까? 아아 얼마나 아름답고 씩씩한 당신들의 새벽입니까?
동아일보, 1936. 6
김현승 시인 /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새벽은 푸른 바다에 던지는 그물과 같이 가볍고 희망이 가득 찼습니다. 밤을 돌려 보낸 후 작은 별들과 작별한 슬기로운 바람이 지금 산기슭을 기어 나온 작은 안개를 몰고 검은 골짜기마다 귀여운 새들의 둥지를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불교를 믿는 저 산맥들이 새벽의 정숙한 묵도(黙禱)를 마친 후에 고 어여쁜 산새들을 푸른 수풀 속에서 내어 놓으면 이윽고 저 하늘은 산딸기 열매처럼 붉어지겠지요?
빨간 숯불을 기다리는 오후에 깨끗한 세탁물을 입고 자장가 부르던 빨랫줄이 새벽의 프레젠트―맑은 이슬을 모아놓고 훌륭한 작품의 감상자를 부르고 있습니다그려! 아아 여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 이슬들입니까? 날마다 모든 사람들이 피곤을 씻으려는 자리에 누워 구상하는 세계가 새벽의 맑고 고요한 틈을 타서 저렇게 작품화된다 합니다. 그러나 밀밭과 노래를 좋아하는 참새들이 일어날 때 다 따 먹고 말겠지.
백색 유니폼을 입은 준령의 조기체조단(早起體操團)인 구름들이 벌써 동방 산마루를 씩씩하게 넘어옵니다. 아마 저렇게 빛나고 기운찬 구름들이 모이면 오늘은 그 용감스런 소낙비가 우리의 성읍(城邑)을 다시 찾아오겠지요? 시원한 바닷바람을 몰고 들어와 문지방에 흐르고 있는 송진과 같이 느긋한 오후의 생존을 약탈하여 가는 그 용감한 협도(俠盜)들 말입니다.
저것 보세요. 붉은 소나무 뚝뚝 찍어 우달북달 묶어 놓은 참외막이 제법 조포미(粗暴美)를 자랑하며 저 산등 위에 가서 있습니다그려! 가지나무의 자색 열매와, 타원형의 푸른 호박과, 산딸기 붉은 열매들이 또한 새벽의 맑은 들을 장식하여 놓기를 잊었겠지요?
그러면 여보, 아침과 저녁 하늘에 애닯고 찬란한 시를 쓰는 예술지상주의자인 태양이 우리들의 사랑하는 풀밭에 내려와 맑고 귀여운 이슬을 죄다 꼬여 가기 전에 당신은 새벽이 부르는 저 푸른 들에 나가지 않으렵니까? 새벽은 위대한 보물을 저 들에 숨겨 놓고 밤의 슬픈 이야기를 계속하는 우리를 부른다 합니다.
동아일보, 193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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