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개 짖는 소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0.

노천명 시인 / 개 짖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는 이의 음성처럼 반갑구나

인가가 여기선 가까운가 보다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식구들 신발이 툇돌 위 나란히 놓인

어느 집 다행(多幸)한 정경이 떠오른다

 

날이 새면 부엌엔 밥김이 어리고

화롯가엔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할머니는 잔소리를 해도 좋을 게다

 

새벽녘 개 짖는 소리는

인가의 정경을 실어다 준다

감방 안에서 생각하는 바깥은

하나같이 행복스럽기만 하다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검정 나비

 

 

너를 피해 달음질치기 열 몇 해

입 축일 샘가 하나 없는 길

자갈돌 발부리 차 피 내며

죽기로 달리다

 

문득 고개 돌리니

너는 내 그림자―나를 따랐구나

내려앉은 꽃잎모양

상장(喪章)과도 같이

 

나 이제

네 앞에 곱게 드리워지나니

오―나의 마지막 날은 언제냐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고별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뢰 같은 박수를 보내 주던 인사들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워졌다

 

고도(孤島)에라도 좋으니 차라리 머언 곳으로―

나를 보내 다오

뱃사공은 나와 방언이 달라도 좋다

 

내가 떠나면

정든 책상은 고물상이 업어 갈 것이고

애끼던 책들은 천덕구니가 되어 장터로 나갈 게다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들과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먹게 던져 주어라

 

온갖 화근이었던 이름 석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 버리련다

나를 어느 떨어진 섬으로 멀리 멀리 보내다오

 

눈물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련다

개 짖는 마을들아

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村家)들아

잘 있거라

 

별이 있고

하늘이 보이고

거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