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개 짖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는 이의 음성처럼 반갑구나 인가가 여기선 가까운가 보다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식구들 신발이 툇돌 위 나란히 놓인 어느 집 다행(多幸)한 정경이 떠오른다
날이 새면 부엌엔 밥김이 어리고 화롯가엔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할머니는 잔소리를 해도 좋을 게다
새벽녘 개 짖는 소리는 인가의 정경을 실어다 준다 감방 안에서 생각하는 바깥은 하나같이 행복스럽기만 하다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검정 나비
너를 피해 달음질치기 열 몇 해 입 축일 샘가 하나 없는 길 자갈돌 발부리 차 피 내며 죽기로 달리다
문득 고개 돌리니 너는 내 그림자―나를 따랐구나 내려앉은 꽃잎모양 상장(喪章)과도 같이
나 이제 네 앞에 곱게 드리워지나니 오―나의 마지막 날은 언제냐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고별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뢰 같은 박수를 보내 주던 인사들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워졌다
고도(孤島)에라도 좋으니 차라리 머언 곳으로― 나를 보내 다오 뱃사공은 나와 방언이 달라도 좋다
내가 떠나면 정든 책상은 고물상이 업어 갈 것이고 애끼던 책들은 천덕구니가 되어 장터로 나갈 게다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들과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먹게 던져 주어라
온갖 화근이었던 이름 석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 버리련다 나를 어느 떨어진 섬으로 멀리 멀리 보내다오
눈물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련다 개 짖는 마을들아 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村家)들아 잘 있거라
별이 있고 하늘이 보이고 거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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