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시인 / 울타리 밖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少女)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少年)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花草)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시인 / 월훈(月暈)
첩첩 산중(山中)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江)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老人)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老人)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박용래 시인 / 유우(流寓) 1
강아지 밥 주고 나니 머리 위 반딧불 떴어라 시비(柴扉) 닫고 멍석머리 모깃불 놓으면 깜박깜박 저만큼 또 반딧불 초롱.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박용래 시인 / 유우(流寓) 2
잿마루 어느 굽이 눈이라도 오는가
유난히 밝은 자작나무 밑둥 물푸레나무 일각(一角)
오오 고삐에 서리는 서리는 황소의 입김
황황히 흩어지는 새떼의 행방(行方)
잿마루 삼십리 눈이라도 오는가.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박용래 시인 / 은버들 몇 잎
스치는 한점 바람에도 갈피 없이 설레는 은버들 몇 잎을 따서 물에 띄우면 언제나 고향은 토담의 달무리. 콩꽃에 맺히는 콩꼬투리랑 절로 벙그는 목화다래랑. 아아 잔물결 잔물결 치듯 속절없이 설레는 강가 은버들.
*
아우야, 휘청휘청 서(西)녘 바람 따르면 상수리숲 상수리 아람 불가.
아우야, 휘청휘청 동(東)녘 바람 따르면 밤나무숲 밤송이 아람 불가. 비치는 쌈짓골, 비치는 비녀산(山). 아침 이슬 털면 아람 불가. 아롱다롱 가을에 아우야.
*
귀뚜라미 정강이 시린 백로(白露).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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