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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보석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0.

김현승 시인 / 보석

 

 

사랑은 마음의

보석은 눈의

술.

 

어느 것은 타오르는 불꽃과 밤의 숨소리가

그 절정에서 눈을 감고.

 

어느 것은 영혼의 의미마저 온전히 빼어 버린

깨끗한 입술

 

그것은 탄소(炭素)빛 탄식들이 쌓이고 또 쌓이어

오랜 기억의 바닥에 단단한 무늬를 짓고.

 

그것은 그 차거운 결정(結晶) 속에

변함 없이 빛나는 애련한 이마아쥬.

 

그리하여 탄환보다도 맹렬한 사모침으로

그것은 원만한 가슴 한복판에서 터진다.

 

나는 이것들을 더욱 아름답고 더욱 단단한

하나의 취(醉)함으로 만들기 위하여,

불붙는 태양을 향하여 어느 날

이것들을 던졌다!

그러나 이 눈의 눈동자, 입을 여는 혀의 첫마디,

이 적과 같이 완강한 빛의 맹세는

더 무너질 것이 없어,

날마다 날마다 그 빛의 뜨거운 품안에서

더욱 더 새롭게 타는 것이다.

 

煞灼Ñ 고독, 관동출판사, 1968

 

 


 

 

김현승 시인 / 부재(不在)

 

 

나는 네 눈동자 속에

깃들여 있지도 않고,

 

나는 네 그림자 곁에 따르지도 않고

나는 네 무덤 속에 있지도 않다.

 

나의 말은 서툴러

나는 네 언어 속에 무늬 맺어

남지도 않고,

나는 내 꿈 속에 비치지도 않는다.

 

네가 나를 찾았을 때

나는 성전에 있지 않았고,

나는 또 돌을 들어 떡을 만든 것도 아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네 튼튼한 발목으로 뛰어 내리지도 않았고,

나는 나의 젊은 곁에

암사슴처럼 길게 누워 있지도 않았다.

 

나는 끝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내 한 줌의 재로 뿌려지는

푸른 강가 흐린 물 속에 있는가.

그 흐르는 강물을

한 개의 별빛이 되어

물끄러미 나는 바라볼 것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내 단단한 뼛속에 있지도 않고,

비 내리는 포도의 한때마저

나는 내 우산 안에 있지도 않았다.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불완전

 

 

더욱 분명히 듣기 위하여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하고,

 

더욱 또렷이 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숨을 죽인다.

 

밤을 위하여

낮은 저 바다에서 설탕과 같이 밀물에 녹고,

 

아침을 맞기 위하여

밤은 그 아름다운 보석들을

아낌없이 바다 속에 던진다.

 

죽은 사자의 가슴에다

사막의 벌떼는 단 꿀을 치고,

 

가장 약한 해골은

승리의 허리춤에서 패자의 이름을 빛낸다.

 

모든 빛과 어둠은

모든 사랑과 미움은

그리고 친척과 또 원수까지도,

조각과 조각들은 서로이 부딪치며

커다란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우리들의 불완전을 오히려 아름답게

노래하여 준다.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빛

 

 

우리의 모든 아름다움은

너의 지붕 아래에서 산다.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주고

창조된 것들은 모두 네가 와서 문을 열어 준다.

 

어둠이 와서 이미 낡은 우리의 그림자를 거두어 들이면

너는 아침마다 명일(明日)에서 빼어 내어

새것으로 바꾸어 준다.

 

나의 가슴에 언제나 빛나는 희망은

너의 불꽃을 태워 만든 단단한 보석,

그것은 그러나 한 빛깔 아래 응결되거나

상자 안에서 눈부실 것은 아니다.

 

너는 충만하다, 너는 그리고 어디서나 원만하다,

너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나의 눈과 같이 작은 하늘에서는

너의 영광은 언제나 넘치어 흐르는구나!

 

나의 품안에서는 다정하고 뜨겁게

거리 저편에서는 찬란하고 아름답게

더욱 멀리에서는 더욱 견고하고 총명하게,

 

그러나 아직은 냉각되지 않은,

아직은 주검으로 굳어져 버리지 않은,

 

너는 누구의 연소하는 생명인가!

너는 아직도 살고 있는 신에 가장 가깝다.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사랑하는 여인에게

 

 

우리의 창이 되어

고요히 닫힌

그러한 눈.

 

보석보다

별을 아끼는

그러한 손―왼손.

우리의 뜻을

밝게도 장미빛으로 태우는

그러한 가슴―둥근 가슴.

목소리―우리의 노래인

맑은 목소리.

 

우리의 기도를 다소곳이

눈물에 올리는

깨끗한 무릎.

 

그러한 여인을

아내와 어미로 맞는

남자의 기쁨.

남자로 태어난 기쁨.

 

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