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떠남
떠남 너의 뒷모양은 언제나 쓸쓸하더라. 너는 젊음을 미워하고 사랑을 시기한다. 너는 어머니와 아들같이 친한 사이를 간섭하기를 유달리 좋아하더라.
사람들은 너를 위하여 산을 헐어 길을 닦고 물 위에 배를 띄운다. 너는 왜 아득한 모래 위에 혼자 앉아 로렐라이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느냐.
나는 너를 잘 안다. 너는 나의 검은 머리털의 힘을 빼앗고 네가 사랑하는 보석은 진주나 낙엽보다 눈물이다. 네게 만일 세월의 친절이 없었던들
이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떠남 너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더라. 네 앞에 자연은 빛을 잃고 기적은 사라지며 원수도 뉘우친다!
조선시단, 1935. 10
김현승 시인 / 마지막 지상에서
산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지평선을 넘어갔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만추의 시
먼저 웃고 먼저 울던 시인이여 끝까지 웃고 끝내 울고 갈 시인이여
한 세대에 하나밖에 없는 언어를 잃은 시인이여
역사의 애인인 그대여 그대 영혼에게 까마귀와 더불어 울게 하라! 마지막 빈 가지에 호올로 남아 울게 하라 울게 하라 길고―또 깊이―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무기의 의미 1
빼지 않은 칼은 빼어 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법
빼어 든 칼은 원수를 두려워하지만 빼지 않은 칼은 원수보다 강한 저를 더 두려워한다.
빼어 든 칼은 이 어두운 밤이슬에 이윽고 녹슬고 말지만 빼어 들지 않은 칼은 저를 지킨다. 이 어둠의 눈물이 소금이 되어 우리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무등차[茶]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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