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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떠남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9.

김현승 시인 / 떠남

 

 

떠남 너의 뒷모양은 언제나 쓸쓸하더라.

너는 젊음을 미워하고 사랑을 시기한다.

너는 어머니와 아들같이 친한 사이를 간섭하기를 유달리 좋아하더라.

 

사람들은 너를 위하여 산을 헐어 길을 닦고

물 위에 배를 띄운다.

너는 왜 아득한 모래 위에 혼자 앉아

로렐라이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느냐.

 

나는 너를 잘 안다.

너는 나의 검은 머리털의 힘을 빼앗고

네가 사랑하는 보석은 진주나 낙엽보다 눈물이다.

네게 만일 세월의 친절이 없었던들

 

이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떠남 너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더라.

네 앞에 자연은 빛을 잃고 기적은 사라지며

원수도 뉘우친다!

 

조선시단, 1935. 10

 

 


 

 

김현승 시인 / 마지막 지상에서

 

 

산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지평선을 넘어갔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만추의 시

 

 

먼저 웃고

먼저 울던

시인이여

끝까지 웃고

끝내 울고 갈

시인이여

 

한 세대에 하나밖에 없는

언어를 잃은 시인이여

 

역사의 애인인 그대여

그대 영혼에게

까마귀와 더불어 울게 하라!

마지막 빈 가지에 호올로 남아

울게 하라

울게 하라

길고―또 깊이―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무기의 의미 1

 

 

빼지 않은 칼은

빼어 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법

 

빼어 든 칼은

원수를 두려워하지만

빼지 않은 칼은

원수보다 강한

저를 더 두려워한다.

 

빼어 든 칼은

이 어두운 밤이슬에

이윽고 녹슬고 말지만

빼어 들지 않은 칼은

저를 지킨다.

이 어둠의 눈물이

소금이 되어 우리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무등차[茶]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