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나무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 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 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나무와 먼 길
사랑이 얼마나 중한 줄은 알지만 나무, 나는 아직 아름다운 그이를 모른다. 하늘 살결에 닿아 너와 같이 머리 고운 여인을 모른다.
내가 시(詩)를 쓰는 오월이 오면 나무, 나는 너의 곁에서 잠잠하마, 이루 펴지 못한 나의 전개(展開)의 이마아쥬를 너는 공중에 팔 벌려 그 모양을 떨쳐 보이는구나! 나의 입술은 메말라 이루지 못한 내 노래의 그늘들을 나무, 너는 땅 위에 그렇게도 가벼이 늘이는구나!
목마른 것들을 머금어 주는 은혜로운 오후가 오면 너는 네가 사랑하는 어느 물가에 어른거린다. 그러면 나는 물 속에 잠겨 어렴풋한 네 모습을 잠시나마 고요히 너의 영혼이라고 불러 본다.
나무, 어찌하여 신께선 너에게 영혼을 주시지 않았는지 나는 미루어 알 수도 없지만, 언제나 빈 곳을 향해 두르는 희망의 척도―너의 머리는 내 영혼이 못 박힌 발부리보다 아름답구나!
머지 않아 가을이 오면 사람마다 돌아와 집을 세우는 가을이 오면, 나무, 너는 너의 수확으로 전진된 어느 황톳길 위에 서서, 때를 맞춰 불빛보다 다스운 옷을 너의 몸에 갈아입을 테지,
그리고 겨울이 오면 너는 머리 숙여 기도를 올릴 테지, 부리 고운 가난한 새새끼들의 둥지를 품에 안고 아침 저녁 안개 속에 너는 과부의 머리를 숙일 테지, 그리고 때로는 굽이도는 어느 먼 길 위에서, 겨울의 긴 여행에 호올로 나선 외로운 시인들도 만날 테지……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다형(茶兄)
빈 들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
마른 잎과 같은 형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를 두고 두고 나만이 호올로 마신다.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독신자
나는 죽어서도 무덤 밖에 있을 것이다.
누구의 품안에도 고이지 않은 나는 지금도 알뜰한 제 몸 하나 없다. 나의 그림자마저 내게서 기르자 그리하여 뉘우쳐 머리 숙인 한 그루 나무같이 나의 문(門) 밖에 세워 두자.
제단은 쌓지 말자 무형한 것들은 나에게는 자유롭고 더욱 선연한 것……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오면, 나의 친구는 먼 하늘의 물 머금은 별들…… 이단을 향하여 기류 밖에 흐르는 보석을 번지우고,
첫눈이 내리면 순결한 살엔 듯 나의 볼을 부비자!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동체시대(胴體時代)
우리는 짧아졌다. 우리는 통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배와 배꼽 아래께서 한여름의 생선처럼 토막나버렸다.
배는 먹고 또 씨앗을 보존하면서 우리는 마른 통나무로 쌓여 가고 있다.
넝쿨 장미가 그 가슴에서 순 돋아 아름다운 어깨 위로 저 구름에까지 자라가기는 틀렸다. 깊이 생각할 뿌리는 말라,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에게도 남아 도는 유희가 없다.
우리는 지금 도끼 옆에 놓여 있다! 통나무가 부르는 가장 친근한 이미지는 도끼다. 손바닥에 침 뱉는 든든한 도끼다.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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