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고독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고독의 끝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도 알게 된다.
신은 무한히 넘치어 내 작은 눈에는 들일 수 없고, 나는 너무 잘아서 신의 눈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잠깐 들렀다가,
내게 숨막혀 바람도 따르지 않는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내가 할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 버린다.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고독의 순금
하물며 몸에 묻은 사랑이나 짭쫄한 볼의 눈물이야.
신(神)도 없는 한세상 믿음도 떠나, 내 고독을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 왔기에 흙 속에 묻힌 뒤에도 그 뒤에도 내 고독은 또한 순금처럼 썩지 않으련가.
그러나 모르리라. 흙 속에 별처럼 묻혀 있기 너무도 아득하여 영원의 머리는 꼬리를 붙잡고 영원의 꼬리는 또 그 머리를 붙잡으며 돌면서 돌면서 다시금 태어난다면,
그제 내 고독은 더욱 굳은 순금이 되어 누군가의 손에서 천년이고 만년이고 은밀한 약속을 지켜 주든지,
그렇지도 않으면 안개 낀 밤바다의 보석이 되어 뽀야다란 밤고동 소리를 들으며 어디론가 더욱 먼 곳을 향해 떠나가고 있을지도……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고독의 풍속
매아미의 노래가 남긴 껍질을, 네 손으로 열매처럼 주워 본 일이 있는가.
잠 안 오는 밤, 네 벽에서 단 한 번 치는 시계 소리를 맹랑하게 들어 본 일이 있는가.
나는 내 장지를 엄지로 튕기쳐, 손바닥 도툼한 곳에서 딱 소리를 내어, 내 고독에 돌을 던져 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왜 울지를 않았는가?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기보다 나의 빈 무덤을 따뜻하게 채웠으며,
단 한마디를 열두 권에 나누어 고요한 불빛 아래 아름답게 꾸며낸 책들을 너는 읽어 보았는가.
새옷을 떨쳐 입고 거리를 한 바퀴 휘저어 돌아온 나의 하루― 그 끝에서 소낙비와 같이 뚝 그쳐 버린 내 춤의 둥근 속도. 박수의 날개들은 메추라기떼와 같이 빈 공중으로 흩어질 때, 나는 이처럼 고독에 악하다.
생애는 남은 것도 없고 또 남기지도 않았다.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 / 고백의 시
나도 처음에는 내 가슴이 나의 시(詩)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가슴을 앓고 있다.
나의 시(詩)는 나에게서 차츰 벗어나 나의 낡은 집을 헐고 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아는 것과는 나에게서는 다르다. 금빛에 입맞추는 것과 금빛을 캐어 내는 것과는 나에게서 다르다.
나도 처음에는 나의 눈물로 내 노래의 잔을 가득히 채웠지만, 이제는 이 잔을 비우고 있다. 맑고 투명한 유리빛으로 비우고 있다.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얻으려면 더욱 얻지 못하는가,
아름다운 장미도 아닌 아름다운 장미와 시간의 관계도 아닌 그 장미와 사랑의 기쁨은 더욱 아닌 곳에, 아아 나의 시(詩)는 마른다! 나의 시(詩)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의 시(詩)는 둘이며 둘이 아닌 오직 하나를 위하여, 너와 나의 하나를 위하여 너에게서 쫓겨나며 나와 함께 마른다! 무덤에서도 캄캄한 너를 기다리며……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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