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가을이 오는 날
구월에 처음 만난 네게서는 나프탈린 냄새가 풍긴다. 비록 묵은 네 양복이긴 하지만 철을 아는 너의 넥타인 이달의 하늘처럼 고웁다.
그리하여 구월은 가을의 첫입술을 서늘한 이마에 받는 달. 그리고 생각하는 혼(魂)이 처음으로 네 육체 안에 들었을 때와 같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의 눈은 지금 맑게 빛난다.
이달엔 먼 수평선이 높은 하늘로 서서히 바꾸이고, 뜨거운 햇빛과 꽃들의 피와 살은 단단한 열매 속에 고요히 스며들 것이다.
구월에 사 드는 책은 다 읽지 않는다. 앞으로 밤이 더욱 깊어질 터이기에 앞으론 아득한 별들에서 가장 가까운 등불로 우리의 눈은 차츰 옮아 올 것이다.
들려오는 먼 곳의 종소리들도 이제는 더 질문하지 않는다. 이제는 고개 숙여 대답할 때다. 네 무거운 영혼을 생명의 알맹이로 때려 얼얼한 슬픔을 더 깊이 울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월이 지나 우리의 마음들 갈가마귀처럼 공중에 떠도는 시월이 오면, 이윽고 여름의 거친 고슴도치는 산과 들에 누워 제 털을 호올로 뽑고 있을 것이다.
煞灼Ñ 고독, 관동출판사, 1968
김현승 시인 / 겨우살이
마른 열매와 같이 단단한 나날, 주름이 고요한 겨울의 가지들, 내 머리 위에 포근한 눈이라도 내릴 회색의 갈앉는 빛깔,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몇 번이고 뒤적거린 낡은 사전의 단어와 같은…… 츄잉 껌처럼 질근질근 씹는 스스로의 그 맛, 그리고 인색한 사람의 저울눈과 같은 정확,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낡은 의자에 등을 대는 아늑함. 문틈으로 새어드는 치운 바람, 질긴 근육의 창호지, 책을 덮고 문지르는 마른 손등,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뜰 안에 남은 마지막 잎새처럼 달려 있는 나의 신앙, 그러나 구약을 읽으면 그나마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煞灼Ñ 고독, 관동출판사, 1968
김현승 시인 / 겨울 까마귀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 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워질 수도 있는,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십이월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에 뿌리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울고 있는 소리로, 까아욱― 깍―
煞灼Ñ 고독, 관동출판사, 1968
김현승 시인 / 겨울 나그네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너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 길을 떠나리라.
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장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
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
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 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해의 낙엽들같이 낯설고 친절한 처음 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
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解凍)의 기적 소리 기적처럼 울려와 땅 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煞灼Ñ 고독, 관동출판사, 1968
김현승 시인 / 겨울 실내악
잘 익은 스토브가에서 몇 권의 낡은 책과 온종일 이야기를 나눈다.
겨울이 다정해지는 두꺼운 벽의 고마움이여. 과거의 집을 가진 나의 고요한 기쁨이여.
깨끗한 불길이여, 죄를 다시는 저지를 수 없는 나의 마른 손이여.
마음에 깊이 간직한 아름다운 보석들을 온종일 태우며, 내 영혼이 호올로 남아 사는 슬픔을 더 부르지 않을 나의 집이여.
절대고독, 성문각,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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