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입춘(立春)
가벼운 기침에도 허리가 울리더니
엊그제 마파람엔 능금도 바람이 들겠다.
저 노곤한 햇볕에 등이 근지러운 곤충처럼 나도 맨발로 토방 아랠 살그머니 내려가고 싶다.
`남풍이 ×m의 속도로 불고 곳에 따라서는 한때 눈 또는 비가 내리겠습니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지구(地球)가 회전(廻轉)하는 대로
거센 바람에 따르는 바다의 함성이라거나, 밀림을 포효하는 짓궂은 짐승들의 몸짓이라거나, 너와 나의 가슴을 두고두고 왕래하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라거나, 생각하면 짐짓 생각하고 볼 양이면,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바람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췰 감출 수 없는 바람결이다'
터지는 양광(陽光)의 그 다사로운 품안에서, 너를 달래고, 나를 달래고, 또 이웃을 달래고, 몇 번이나 눈짓하고, 끝내는 바스러지게 포옹을 할지언정,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포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 스러질 수 없는 포말이다'
할닥이는 숨결로 이 치사스런 생명과 시를 다스리며, 더러는 슬기로운 전쟁으로 불장난을 하고, 더러는 삶과 죽음의 건널목에서 독을 머금은 혓바닥으로 꿈과 생시를 의논하며, 녹이 슬었을 극락을 의욕하지만, `지구'라는 지옥에서 허덕이는 한,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꽃가루였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필 머금은 꽃가루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대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 몸이 젖어……
란아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할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란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竹]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촐촐한 밤
새새끼 포르르 날아가버리듯 오늘밤 하늘에는 별도 숨었네
풀려서 틈 가는 요즈음 땅에는 오늘밤 비도 스며들겠다
어두운 하늘을 제쳐보고 싶듯 나는 오늘밤 먼 세계가 그리워……
비 나리는 촐촐한 이 밤에는 왜감[蜜柑] 껍질이라도 지근거리고 싶고나!
나는 이런 밤에 새끼꿩 소리가 그립고 흰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를 꿈꾸고 싶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추과삼제(秋果三題)
1. 밤
명랑한 이 가을 고요한 석양에 저 밤나무숲으로 나아가지 않으렵니까?
숲속엔 낙엽의 구으는 여운(餘韻)이 맑고 투욱 툭 여문 밤알이 무심히 떨어지노니
언덕에 밤알이 고이 져 안기우듯이 저 숲에 우리의 조그만 이야기도 간직하고
때가 먼 항해를 하여오는 날 속삭이기 위한 아름다운 과거를 남기지 않으려니?
2. 감
하―얀 감꽃 뀌미뀌미 뀌이던 것은 오월이란 시절이 남기고 간 빛나는 이야기거니
물밀듯 다가오는 따뜻한 이 가을에 붉은 감빛 유달리 짙어만지네
오늘은 저 감을 또옥 똑 따며 푸른 하늘 밑에서 살고 싶어라 감은 푸른 하늘 밑에서 사는 붉은 열매이어니
3. 석류
후원에 따뜻한 햇볕 굽어보면 장꽝에 맨드라미 고웁게 빛나고
마슬간 집 양지 끝에 고양이 졸음 졸 때 울밑에 석류알이 소리 없이 벌어졌네
투명한 석류알은 가을을 장식하는 홍보석이어니 누구와 저것을 쪼개어먹으며 시월 상달의 이야기를 남기리……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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