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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입춘(立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7.

신석정 시인 / 입춘(立春)

 

 

가벼운

기침에도

허리가 울리더니

 

엊그제

마파람엔

능금도 바람이 들겠다.

 

노곤한 햇볕에

등이 근지러운 곤충처럼

나도

맨발로 토방 아랠

살그머니 내려가고 싶다.

 

`남풍이 ×m의 속도로 불고

곳에 따라서는 한때 눈 또는 비가 내리겠습니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지구(地球)가 회전(廻轉)하는 대로

 

 

거센 바람에 따르는 바다의 함성이라거나, 밀림을 포효하는 짓궂은 짐승들의 몸짓이라거나, 너와 나의 가슴을 두고두고 왕래하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라거나, 생각하면 짐짓 생각하고 볼 양이면,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바람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췰 감출 수 없는 바람결이다'

 

터지는 양광(陽光)의 그 다사로운 품안에서, 너를 달래고, 나를 달래고, 또 이웃을 달래고, 몇 번이나 눈짓하고, 끝내는 바스러지게 포옹을 할지언정,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포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 스러질 수 없는 포말이다'

 

할닥이는 숨결로 이 치사스런 생명과 시를 다스리며, 더러는 슬기로운 전쟁으로 불장난을 하고, 더러는 삶과 죽음의 건널목에서 독을 머금은 혓바닥으로 꿈과 생시를 의논하며, 녹이 슬었을 극락을 의욕하지만, `지구'라는 지옥에서 허덕이는 한,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꽃가루였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필 머금은 꽃가루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대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 몸이 젖어……

 

란아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할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란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竹]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촐촐한 밤

 

 

새새끼 포르르 날아가버리듯

오늘밤 하늘에는 별도 숨었네

 

풀려서 틈 가는 요즈음 땅에는

오늘밤 비도 스며들겠다

 

어두운 하늘을 제쳐보고 싶듯

나는 오늘밤 먼 세계가 그리워……

 

비 나리는 촐촐한 이 밤에는

왜감[蜜柑] 껍질이라도 지근거리고 싶고나!

 

나는 이런 밤에 새끼꿩 소리가 그립고

흰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를 꿈꾸고 싶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추과삼제(秋果三題)

 

 

1. 밤

 

명랑한 이 가을 고요한 석양에

저 밤나무숲으로 나아가지 않으렵니까?

 

숲속엔 낙엽의 구으는 여운(餘韻)이 맑고

투욱 툭 여문 밤알이 무심히 떨어지노니

 

언덕에 밤알이 고이 져 안기우듯이

저 숲에 우리의 조그만 이야기도 간직하고

 

때가 먼 항해를 하여오는 날 속삭이기 위한

아름다운 과거를 남기지 않으려니?

 

2. 감

 

하―얀 감꽃 뀌미뀌미 뀌이던 것은

오월이란 시절이 남기고 간 빛나는 이야기거니

 

물밀듯 다가오는 따뜻한 이 가을에

붉은 감빛 유달리 짙어만지네

 

오늘은 저 감을 또옥 똑 따며 푸른 하늘 밑에서 살고 싶어라

감은 푸른 하늘 밑에서 사는 붉은 열매이어니

 

3. 석류

 

후원에 따뜻한 햇볕 굽어보면

장꽝에 맨드라미 고웁게 빛나고

 

마슬간 집 양지 끝에 고양이 졸음 졸 때

울밑에 석류알이 소리 없이 벌어졌네

 

투명한 석류알은 가을을 장식하는 홍보석이어니

누구와 저것을 쪼개어먹으며 시월 상달의 이야기를 남기리……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 1시집 『촛불』(1939)과, 8.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

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