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오는 팔월(八月)에도
아주 오랜 옛날 할아버지의 긴 장죽(長竹)에 부싯돌을 그어 대면 푸시시 푸시시 잎담배 타는 것이 퍽은 신기로웠다.
그것은 호랑이가 새낄 쳐 나간다는 `변산(邊山)'이란 두메서 밀경(密耕)하는 담배가 가만가만 들어오던 때의 일이었다.
아직 소년이었던 나는 담배에 입맛을 붙여 숨어 피우던 그 쌉쏘름한 담배 맛을 시방도 아예 잊을 길이 없다.
인젠 할아버지의 부싯돌은 필연상(筆硯床)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모르지만, 할아버지 산소엘 성묘 가는 팔월이면
길 솟는 담배밭이 연이은 너머로 푸른 바다가 남실거리고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가 아스라이 보이는 곳.
사뭇 십 리를 가도 이십 리를 가도 삼십 리를 가도 그 너붓너붓한 담배 이파리가 해풍에 흔들리는 풍경 속을 걷다가
문득 할아버지의 그 부싯돌이 생각나서 돌아오는 성묘길에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그 쌉쌀한 풋담배를 피워 물고 보는 하늘은 유달리 푸르렀다.
오는 팔월에도 담배밭 너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그 산지기 영감님의 쌈지에서 잎담밸 한 대만 꼬옥 얻어 피우리라.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은방울꽃
나는 그때 외롭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를 옮아앉으며 `동박새'가 울고 있었다.
어쩜 혼자 우는 `동박새'는 나도곤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숲길에선 은방울꽃 내음이 솔곳이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 맑은 눈망울을 은방울꽃 속에서 난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너희 가슴속에 핀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젊고 늙은 산맥들을 또 푸른 바다의 거만한 가슴을 벗어나 우리들의 태양이 지금은 어느 나라 국경을 넘고 있겠습니까?
어머니 바로 그 뒤 우리는 우리들의 화려한 꿈과 금시 떠나간 태양의 빛나는 이야기를 한참 소근대고 있을 때 당신의 성스러운 유방같이 부드러운 황혼이 저 숲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어머니 황혼마저 어느 성좌로 떠나고 밤―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또 왔습니다
태양이 가고 빛나는 모든 것이 가고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어머니 옛이야기나 하나 들려주세요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이속(離俗)의 장(章)
철철이 꽃을 가꾸시고, 또 그 씨앗을 받으시는 당신의 모습이 어쩌면 성근 잎 사이에 꽃대를 올리는 한 그루의 난초가 아니면 허울 다 벗어 버리고 한두 송이 꽃으로 능히 그 향기를 전하는 고담(枯淡)한 매화나무와도 같사옵니다.
때때로 망연히 하늘과 하늘 사이에 뻗어나간 산을 바라보시는 의젓한 눈자위에는 영롱한 정기가 아직도 청춘에 뒤지지 않는 것은 꽃 같은 당신의 어진 마음의 표상인가 보옵니다.
다시금 꽃을 매만지시고, 쓰다듬고 하시는 양이 어쩌면 어린 손주 다루시듯 사념(邪念)이 없사오시니, 당신의 숨결이 또한 꽃 속에 스며 열매와 같이 성숙하는 것을 당신은 무심히 아시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꽃가루와 꽃가루가 부딪쳐, 고 까아만 씨앗이 영그는 속에 간직한 어린 나비의 나랫소리와 꿀벌들의 실내악 같은 음악소리와 간간이 꽃이파리 옆에 사운대다 떠나는 가는 바람소리에 뒤섞인 당신의 가벼운 기침소리와, 그 맑은 음성 또한 씨앗 속에 간직된 이것들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우리들의 깊은 마음 아래 내려가 미칠 수 없는 머언 계단에서 참하고 에쁘고 아름다운 일이 이루어지고 열리어 가듯 꽃이파리 하나와 까아만 씨앗 속에서 비롯하고 이어가고 끝내는 삶과 죽음이 담담하게 계승되는 것을 당신은 오늘도 꽃 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옵나이까?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이야기
상나무가 둘러 잇는 마을 샘에서는 `숲안댁'이랑 `양년이'네 언니랑 그 지긋지긋한 감저순과 봄내 먹어내던 쑥을 헹구면서 `돌쇠'엄마가 가엾다고들 이야기하였다.
옥같은 서리쌀밤에 절이지를 감아 한 사발만 먹고프다던 `돌쇠'엄마는 해산한 뒤 여드렐 꼬빡 감저순만 먹다가 그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감저순은 속을 몹시 깎아낸다는 이야기, 그러기에 흉년(凶年) 너무새론 쑥을 덮어 먹을 게 없다는 이야기, 소같이 마냥 먹어내던 쌀겨도곤 차라리 패를 훑어 죽을 끓여 먹는 게 낫나는 이야기……
샘을 둘러 서 있는 상나무에서도 감저순과 쑥내음새가 구수하고 마을 아낙네의 새로운 생존철학(生存哲學) 강의(講義)에서도 너무새 내음새가 자꾸만 풍겨온다.
하늘이여 피가 돌기에 마련이면 어찌 독새기를 먹어야 하는 가뭄과 농토를 앗아가고 쌀겨을 먹이는 물난리와 자맥을 먹는 벼이삭에 몹쓸 바람을 보내야 하는가.
가을도곤 오는 봄을 근심하는 마을 아낙네의 서글픈 이야기가 오늘도 내일도 퍼져가는 한 지구(地球)는 영원히 아름다운 별일 수 없다.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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