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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용래 시인 / 먼 바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5.

박용래 시인 / 먼 바다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마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시인 / 모일(某日)

 

 

1

 

쌀 씻는 소리에

눈물 머금는 미명(未明)

 

봉선화야

 

기껍던 일

그 저런 일.

 

2

 

노랗게 물든 미루나무 길섶 먼

 

고향길 해야 지는가

 

아버지

 

어머니

 

같은 사람들

 

느릿느릿 뒷짐 지르고 가는

 

모과(木瓜)빛 물든 길섶을 해야 지는가

 

3

 

들깨 냄새가 나는 울안

 

골마루 끝에 매미 울음 스몄는가

 

목을 늘여

 

먹던 금계랍의 쓴 맛.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시인 / 물기 머금 풍경 2

 

 

반쯤 들창 열고 본다.

 

드문드문 상고머리 솔밭

넘어가는 누런 해

반쯤만 본다.

잉잉 우는 전신주

귀퉁이에 매달린 연 꼬리

아슬히 비낀 소년의 꿈도

 

반의 반쯤만 본다.

 

비가 올 것인가.

 

눈이 올 것이다.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시인 / 미닫이에 얼비쳐

 

 

호두 깨자

눈 오는 날에는

 

눈발 사근사근

옛말 하는데

 

눈발 새록새록

옛말 하자는데

 

구구샌 양 구구새 모양

미닫이에 얼비쳐

 

창호지 안에서

호두 깨자

 

  호두는 오릿고개

  싸릿골 호두.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박용래 시인 / 버드나무 길

 

 

맘 천근 시름겨울 때

천근 맘 시름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가자.

고인 물에 얼비치는

쑥부쟁이

염소 한 마리

몇 점의 구름

홍안(紅顔)의 소년(少年) 같이

보러 가자.

 

함지박 아낙네 지나가고

어지러이 메까치 우짖는 버드나무

길.

 

마른 논에 고인 물.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朴龍來, 1925.8.14~1980.11.21] 시인

1925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강경 상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중』(1980) 등과 시전집 『먼바다』(1984)가 있음. 1961년 제5회 충남문학상과 1969년 시집 『싸락눈』으로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과 1980년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