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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용래 시인 / 그 봄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4.

박용래 시인 /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낙차(落差)

 

 

꼬이고 꼬인 등(藤)나무 등걸

 

깨진 고령토 화분(花盆)

 

삿갓머리 씌운 배추 움

 

떠받친 빨랫줄

 

지연(紙鳶)낚던 손

 

빛 바랜 숙근초(宿根草)

 

서릿발 내린 사면(斜面)

 

복판에 이마 부비며 피는 마을 사람들

 

저수지(貯水池)의 물안개

 

비탈에 지던 낙차(落差)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둘레

 

 

산은

산빛이 있어 좋다

먼 산 가차운 산

가차운 산에

버들꽃이 흩날린다

먼 산에

저녁해가 부시다

아, 산은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시인 / 들판

 

 

가을, 노적가리 지붕 어스름 밤 가다가 기러기 제 발자국에 놀래 노적가리 시렁에 숨어버렸다 그림자만 기우뚱 하늘로 날아 그때부터 들판에 갈림길이 생겼다.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먹감

 

 

어머니 어머니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아버지 아버지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가을은

오십 먹은 소년

먹감에 비치는 산천

굽이치는 물머리

잔 들고

어스름에 스러지누나

자다 깨다

깨다 자다.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박용래 [朴龍來, 1925.8.14~1980.11.21] 시인

1925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강경 상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중』(1980) 등과 시전집 『먼바다』(1984)가 있음. 1961년 제5회 충남문학상과 1969년 시집 『싸락눈』으로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과 1980년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