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시인 /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낙차(落差)
꼬이고 꼬인 등(藤)나무 등걸
깨진 고령토 화분(花盆)
삿갓머리 씌운 배추 움
떠받친 빨랫줄
지연(紙鳶)낚던 손
빛 바랜 숙근초(宿根草)
서릿발 내린 사면(斜面)
복판에 이마 부비며 피는 마을 사람들
저수지(貯水池)의 물안개
비탈에 지던 낙차(落差)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둘레
산은 산빛이 있어 좋다 먼 산 가차운 산 가차운 산에 버들꽃이 흩날린다 먼 산에 저녁해가 부시다 아, 산은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시인 / 들판
가을, 노적가리 지붕 어스름 밤 가다가 기러기 제 발자국에 놀래 노적가리 시렁에 숨어버렸다 그림자만 기우뚱 하늘로 날아 그때부터 들판에 갈림길이 생겼다.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먹감
어머니 어머니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아버지 아버지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가을은 오십 먹은 소년 먹감에 비치는 산천 굽이치는 물머리 잔 들고 어스름에 스러지누나 자다 깨다 깨다 자다.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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