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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생존(生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4.

신석정 시인 / 생존(生存)

 

 

체온(體溫)도 스며들지 않는

서글픈 악수에 지친 주민(住民)이기에

나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숨이 가빠

그래도 숨이 가빠

어항도곤 좁은 지구를

뛰어나가고 싶었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서가(書架)

 

 

개미새끼 흙탑을 쌓아올리듯

작은 서가에 틈 없이 책을 쌓아놓고

 

마음이 호수처럼 가라앉는 날……

한권 두권 내들고 읽는 한가한 날……

 

때로는 서가가 드높은 산같이 보이기도 하고

나는 그 산을 천천히 오르기도 하고

 

곤륜산보다 더 깊숙한 내 서가에

오늘은 난초 향기가 그윽이 흐르는 듯하이…….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서정가(抒情歌)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취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버리는……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서정소곡(抒情小曲) -1-

 

 

삼월보다 따스한

네 손을 달라.

 

백목련보다 하이얀

네 가슴을 달라.

 

불보다 불보다 뜨거운

네 심장을 달라.

 

시방 거리에는

음악 같은 실비 내리고,

 

실비 내리는 속에

동백꽃 뚜욱 뚝 지는 소리 들려오고,

 

돌멩이의 체온도 그리운

죽음보다 외로운 오후.

 

음악같이 내리는 실비 속에

나는 산처럼 서서 널 생각한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서정소곡(抒情小曲) -2-

 

 

별빛 비마냥 쏟아지던 밤에도

수련(水蓮)꽃은 뚝뚝 떨어집데다.

 

태양(太陽)의 눈부신 분수(噴水) 속에서도

수련(水蓮)꽃 이파리는 날립데다.

 

바람도 없이 낮달이 흐르는데

수련(水蓮)꽃은 자꾸만 지던데요.

 

슬픈 역사(歷史)가 마련하는 이야기

낡은 청춘에도 젖어듭네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 1시집 『촛불』(1939)과, 8.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

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