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생존(生存)
체온(體溫)도 스며들지 않는 서글픈 악수에 지친 주민(住民)이기에 나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숨이 가빠 그래도 숨이 가빠 어항도곤 좁은 지구를 뛰어나가고 싶었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서가(書架)
개미새끼 흙탑을 쌓아올리듯 작은 서가에 틈 없이 책을 쌓아놓고
마음이 호수처럼 가라앉는 날…… 한권 두권 내들고 읽는 한가한 날……
때로는 서가가 드높은 산같이 보이기도 하고 나는 그 산을 천천히 오르기도 하고
곤륜산보다 더 깊숙한 내 서가에 오늘은 난초 향기가 그윽이 흐르는 듯하이…….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서정가(抒情歌)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취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버리는……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서정소곡(抒情小曲) -1-
삼월보다 따스한 네 손을 달라.
백목련보다 하이얀 네 가슴을 달라.
불보다 불보다 뜨거운 네 심장을 달라.
시방 거리에는 음악 같은 실비 내리고,
실비 내리는 속에 동백꽃 뚜욱 뚝 지는 소리 들려오고,
돌멩이의 체온도 그리운 죽음보다 외로운 오후.
음악같이 내리는 실비 속에 나는 산처럼 서서 널 생각한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서정소곡(抒情小曲) -2-
별빛 비마냥 쏟아지던 밤에도 수련(水蓮)꽃은 뚝뚝 떨어집데다.
태양(太陽)의 눈부신 분수(噴水) 속에서도 수련(水蓮)꽃 이파리는 날립데다.
바람도 없이 낮달이 흐르는데 수련(水蓮)꽃은 자꾸만 지던데요.
슬픈 역사(歷史)가 마련하는 이야기 낡은 청춘에도 젖어듭네다.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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