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산(山)은 알고 있다
산은 어찌 보면 운무와 더불어 항상 저 아득한 하늘을 연모하는 것 같지만 오래오래 겪어 온 피묻은 역사의 그 생생한 기록을 잘 알고 있다.
산은 알고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기나긴 세월에 묻어간 모든 서럽고 빛나는 이야기를 너그러운 가슴에서 철철이 피고 지는 꽃들의 가냘픈 이야기보다도 더 역력히 알고 있다.
산은 가슴 언저리에 그 어깨 언저리에 스며들던 더운 피와 그 피가 남기고 간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마련하는 역사와 그 역사가 이룩할 줄기찬 합창소리도 알고 있다. 산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슬 젖은 하얀 촉루가 딩구는 저 능선과 골짜구니에는 그리도 숱한 풀과 나무와 산새와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흘러가는 시냇물과 시냇물이 모여서 부르는 노랫소리와 철쭉꽃 나리꽃과 나리꽃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개에 사운대는 바람과 바람결에 묻혀가는 꿈과 생시를 산은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산은 우리들이 내일을 믿고 살아가듯 언제나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가슴을 벌린 채 피묻은 역사의 기록을 외우면서 손을 들어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이여! 나도 알고 있다. 네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산방일기(山房日記)
봉우리 넘어오는 구름 추녀를 스쳐가고
골엔 꾀꼬리 화답(和答)하는 소리 산이 울린다.
방을 둘러가는 산나비 지친 나랫소리―
그저 해만 설핏하면 소쩍새 울고,
산도 을씨년스러워 하늘만 바라보는데,
밤 들기 전 풀벌레 사운대는 속에 나긋나긋 잠이 온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산산산(山山山)
지구(地球)엔 돋아난 산(山)이 아름다웁다.
산(山)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山)에는 아무 죄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더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山)이 되어보나 하고 기린(麒麟)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산(山) 산(山) 산(山)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산협인상(山峽印象)
밋밋한 오리나무 숲을 성낸 짐승처럼 함부로 헤쳐나오면 성근 소나무 소나무 사이로 아스므라한 바라 푸른 언덕에 솟아오르고 꾀꼬리 호반새 울어예는 산협에 홈초로니 푸른 오월이 지르르 흘러……
시냇물 졸졸졸 사뭇 지즐대는 기슭에 전나무 상나무 대수풀 우거지고 간지람나무 바람풍나무 제자리 잡아 서고 언덕을 돌아드는 오월 바람이 간지러워 간지러워 나뭇잎새들은 푸른 손을 자꾸만 뒤흔들며 몸부림친다
나는 짐승도 아니란다 나무도 아니란다 얇은 모시두루마기에 덮인 채 백로처럼 날아볼 수도 없고나 태화처럼 흔들릴 수도 없고나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잔인한 촛불에게 추방을 당하면서도 나의 침실을 잊지 않는 충실한 어둠이여
오늘밤 나는 너를 위하여 촛불을 끄고 재 작은 침실의 전면적을 제공하노니
어둠이여 너는 오늘밤에도 나를 안고 새벽이 온다는 단조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지?
그러나 나는 밤마다 네가 속삭이는 그 새벽을 한 번도 맞아본 일은 없다
(대체 네가 새벽이 온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오래되건만……)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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