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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용래 시인 / 고추잠자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3.

박용래 시인 / 고추잠자리

 

 

비잉 비잉 돈다

어릴 때 하늘이

 

물빛 대싸리 위에만

뜨던 고추잠자리떼

하늘이

 

알몸에 고여

빙빙빙 돈다

 

부질없는 이 오후(午後)의 열(熱)

늦은 시간(時間)이 내의(內衣)를 적신다.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시인 / 곰팡이

 

 

진실(眞實)은

진실(眞實)은

 

지금 잠자는 곰팡이뿐이다

지금 잠자는 곰팡이뿐이다

 

누룩 속에서

광 속에서

 

명정(酩酊)만을 위해

오오직

 

어둠 속에서

……

 

거꾸로 매달려

 

먼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시인 / 구절초(九節草)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박용래 시인 / 귀울림

 

 

호박잎

하눌타리 자락

짓이기고

황소떼 몰린

물구나무 선

동구(洞口)

 

(아삼한 곡성(哭聲))

 

아, 추수도 끝난

가을 한철

저물녘

논배미

물꼬에 뜬

우렁 껍질의

귀울림.

 

아지풀, 민음사, 1975

 

 


 

 

박용래 시인 / 그늘이 흐르듯

 

 

오월(五月)은,

초록

비 젖어

허전한

SPELL

가슴에,

밀려

일찍

없었던 맘.

물에

그늘이 흐르듯

흐르는 그리움,

아 오월(五月)은

외로운

SPELL,

비로 엮는

가슴.

생각다 생각해

부식(腐蝕)하는

영상(映像).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朴龍來, 1925.8.14~1980.11.21] 시인

1925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강경 상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중』(1980) 등과 시전집 『먼바다』(1984)가 있음. 1961년 제5회 충남문학상과 1969년 시집 『싸락눈』으로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과 1980년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