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소곡(小曲)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5.

신석정 시인 / 소곡(小曲)

 

 

산이여

그 무슨 그리움이 복받쳐

지구와 더불어 탄생한 이후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느뇨

 

산이여

나 또한 진정 그리운 것 있어

발돋움하고 우러러보아도

나의 하늘은 너무 아득하고나!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수선화(水仙花)

부제: 눈 속에 `사슴'을 보내주신 백석(白石)님께 드리는 수선화 한 폭

 

 

수선화는

어린 연잎처럼 오므라진 흰 수반에 있다

 

수선화는

암탉 모양하고 흰 수반이 안고 있다

 

수선화는

솜병아리 주둥이같이 연약한 움이 자라난다

 

수선화는

아직 햇볕과 은하수를 구경한 적이 없다

 

수선화는

돌과 물에서 자라도 그렇게 냉정한 식물이 아니다

 

수선화는

그러기에 파아란 혀끝으로 봄을 핥으려고 애쓴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슬픈 전설(傳說)을 지니고

 

 

나무 사이로

가시 사이로

잎 사이로

엽맥이 드러나게 햇볕이 흘러들고

젊은 산맥 멀리 푸른 하늘이 넘어갑니다

 

어머니

한때는 하늘을 잃어버리고

한때는 햇볕을 잃어버리고

슬픈 전설을 가슴에 지닌 채

죄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죄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하늘이 너무 푸르지 않습니까?

햇볕이 너무 빛나지 않습니까?

어머니

당신은 아예 슬픈 전설을 빚어내지 마십시오

 

너그러운 햇볕을 안고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슬픈 전설은 심장에 지니고

정정한 나무처럼 살아가오리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애가(哀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K에게

 

 

지구래도 변방 몹쓸 땅이었다

 

거센 태풍이 지나간 뒤

 

자작나무가 쓰러지더라

물푸레나무가 쓰러지더라

 

하늘이 못 견디게 푸르고

못 견디게 푸른 하늘로 태양이 왕래하고

은하수가 산을 넘어 흐르고

산을 넘어 흐르는 은하수에 별이 빠지고

 

한때는 이렇게 너그러운 세월이 있었느니라

한때는 이렇게 말썽 많은 세월이 있었느니라

 

태풍이 지나간다

지구가 풍선처럼 몰려가나부다

 

오동나무가 쓰러진다

은행나무도 쓰러진다

 

너도 쓰러지고

나도 쓰러져야 하는 날

 

인젠 태양도 별도 믿을 수 없다

차라리 어두운 밤에서

한 백년 더 살아보리라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역사(歷史)

 

 

1

 

저 허잘것없는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더라도, 다사롭게 타오르는 햇볕이라거나, 보드라운 바람이라거나, 거기 모여드는 벌나비라거나, 그보다도 이 하늘과 땅 사이를 아렴풋이 이끌고 가는 크나큰 그 어느 알 수 없는 `마음'이 있어, 저리도 조촐하게 한 송이의 달래꽃은 피어나는 것이요, 길이 멸(滅)하지 않을 것이다.

 

2

 

바윗돌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大地)를 뚫고 솟아오른, 저 애잔한 달래꽃의 긴긴 역사(歷史)라거나, 그 막아낼 수 없는 위대(偉大)한 힘이라거나, 이것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내가 찬양하는 것도, 오래오래 우리 마음에 걸친 거추장스러운 푸른 수의(囚衣)를 자작나무 허울 벗듯 훌훌 벗고 싶은 달래꽃같이 위대(偉大)한 역사(歷史)와 힘을 가졌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요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더라도, 햇볕과 바람과 벌나비와, 그리고 또 무한(無限)한 `마음'과 입맞추고 살아가듯, 너의 뜨거운 심장(心臟)과 아름다운 모든 것이 샘처럼 온통 괴어 있는, 그 눈망울과 그리고 항상 내가 꼬옥 쥘 수 있는 그 뜨거운 핏줄이 나뭇가지처럼 타고 오는 뱅어같이 예쁘디예쁜 손과, 네 고운 청춘(靑春)이 나와 더불어 가야 할 저 환히 트인 길이 있어 늘 이렇게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 1시집 『촛불』(1939)과, 8.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

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