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는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가을 치마
서둘러 봄을 나서던 한국의 여인들도 가을에 닿으면 애틋한 마음을 깨닫나 부다.
그래서 회장저고리는 봄날의 꽃소식처럼 짧게 입고 그래서 열두 폭 치마는 굽이굽이 긴긴 가을밤처럼 늘이어 두르나 부다.
한국의 맑은 눈들이여 그 마음을 지키는 눈들이여! 이 가을엔 미니로 더럽힌 차가운 무릎을 덮고 저 파란 하늘빛으로 긴긴 가을 치마를 늘이어지이다. 그 끝자락엔 그리고 귀뚜라미 맑은 울음으로 가을의 보석이라도 달아지이다.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가을은 눈의 계절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도 순수한 언어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만큼이나 멀리 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 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가을의 시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를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가을의 향기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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