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추야장(秋夜長) 고조(古調)
오동(梧桐)에 비낀 달 가을은 치워라.
고매(古梅) 성근 가지 영창에 거지었고,
철새 나는 하늘을 무서리 나려
풀벌레 사운대는 밤은 정작 고요도 한저이고
어디서 대피리소리 마디마디 가슴이 시리다.
시나대숲에 바람이 머물어 촛불도 눈물짓는 기인 긴 이 밤
나는 당시(唐詩)를 펴들고 아득한 아득한 잠을 부른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축제(祝祭)
산정(山頂)에는 찢어진 하늘의 펄럭이는 푸른 깃폭 속에, 우리들의 가쁜 숨결이 숨어 있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전쟁이 뿌리고 간 고운 피를 머금은 파란 도라지꽃들의 회화(會話)가 잦은데, 파도처럼 달려드는 바람소리 말을 달려 간 골짜구니마다 하얀 촉루가 동굴 같은 눈 언저리에 눈부신 태양을 받아들이곤 이슬같이 수떨이고 있다.
축제도 끝났다. 가면무도회도 끝났다. 인젠 모두 우리들의 때묻은 검은 야회복(夜會服)을 벗어던져도 좋다.
이렇게 촉루와 도라지꽃이 난만한 산을 데불고 꽃잎 같은 시간을 맞이하고 지우고 지우고 맞이하 는 동안 슬픈 강물엔 우리들의 역사도 띄워보냈다.
탕자(蕩子)처럼 돌아올 줄 모르는 인공위성이 몇천 바퀴를 돌아가도,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의연히 그들의 무도회와 촉루와 도라지꽃을 구상(構想)하는 욕된 세월 속에 다시금 가져야 할 축제를 마련하면 그것이 `내일'이라는 희망 속에서, 무수한 절망과 자살과 투옥은 계산되는 것이다.
산이여! 너는 그러기에 오늘도 통곡을 생각하는 슬픔 속에 서 있는가? 통곡하라! 목놓아 어서 통곡하라. `내일'! `내일'의 축제를 위하여!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파도(波濤)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사람 구월도 깊었다.
철 그른 뻐꾸기 목멘 소리 애가 잦아 타는 노을
안쓰럽도록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 놓고
이대로 차마 이대로 눈감을 수도 없거늘
산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오는 날은
소나무 성근 숲너머 파도소리가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으로 달래 놓고 파도 밖에 트여올 한 줄기 빛을 본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파초(芭蕉)잎을 밟고 가는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바람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 벌써 골 붉은 감잎이 휘날린다.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빗발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 사철 발 벗은 네가 보고파라.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달빛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 어디서 귀또리가 안쓰럽게 운다.
파초잎을 밟고 가는 내 어린 꿈 속에 겨울은 서서
― 저렇게 하이얀 눈을 날리는고나.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파초와 이웃하고
파초는 나와 이웃하고 산다. 나도 파초와 이웃하고 산다.
파초는 가끔 그 넓은 손으로 나의 창문을 흔든다. 휘영청 달밤에도 파초는 혼자 밤을 새우는 게 멋적은지 일쑤 나를 불러내곤 한다. 어쩐지 나도 외로워서 뛰쳐나가선 파초와 나란히 서서 달을 본다.
파초에 동부새가 온다. 하늬바람도 찾아온다. 허지만 비를 몰고 오는 마파람을 파초는 더 좋아한다.
후두둑 후두둑 파초잎을 밟고 가는 빗발에 영창이 어룽지고, 어룽진 영창가에 나는 붙어서서 파초를 지켜보며 산다.
파초를 이웃하고 살다 보니 인젠 정이 들었다.
그 아기자기한 정에 겨워 오늘도 우리 안사람이랑 함께 파초 옆에 서서 떠나간 `지훈(芝薰)'의 이야길 하다가 문득,
접때 광주 손주놈을 보고 돌아오던 날 비행기 창 옆으로 구름 밖으로 물러가던 무등산을 생각하면서, 고 `상락(尙樂)'이 놈이 퍽은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 둘이는 뜨거운 눈맞춤을 하는 것이었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따뜻한 햇볕 물 우에 미끄러지고 흰 물새 동당동당 물에 뜨듯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누런 잔디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 염소 그림자 물 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가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잦았다…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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