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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9.

신석정 시인 /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뱀이 부시시 눈을 떠보았다.

 

― 그러나 아직 겨울이었다.

 

하도 땅속이 훈훈해서

개구리도 뒷발을 쭈욱 펴보았다.

 

― 그러나 봄은 아니었다.

 

어디서 살얼음 풀린 물소리가 나서

나무움들도 살포시

밖을 내다보았다.

 

― 그러나 머언 산엔 눈이 하얗다.

 

핸 멀찌막히 `경칩(驚蟄)'을 세워 놓고

이렇게 따뜻하게 비췰 건 뭐람?

 

― 그러나 봄 머금은 햇볕이어서 좋다.

 

미치고 싶도록 햇볕이 다냥해서

나도 발을 쭈욱 펴고 눈을 떠본다.

 

― 그러나 `입춘(立春)'은 칼렌다 속에

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한대식물(寒帶植物)

 

 

푸른 계절이 모조리 휩쓸려가고

건강한 산맥들이 아주 물러앉은 뒤

세월은 오로지 슬픈 이야기만 싣고

장미처럼 받들던 네 심장을 사뭇 지나갔다

 

한사코 태양을 따라다니던 대낮도 인젠 싫다

푸른 하늘까지도 단숨에 삼키는 거룩한 밤을 가졌노라

한때 곤곤히 흐르던 난류가 멈춘 이후

네 심장에는 나날이 자라가는 한대식물이 무성하고나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항구(港口)에서

 

 

네가 떠난 항구(港口)에

오월 바람이 설렌다.

 

머리칼을 날리는 젊은 아낙네들은

베피떡이랑 뎀뿌라랑 소주병을 늘어놓고

뱃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꼬박꼬박 기두리고 있는 항구(港口).

 

가대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발 벗은 아이들은

구호양곡(救護糧穀)의 가마니에서 쑤시알갱이가 빠지면

병아리처럼 주워서는 차대기에 넣는 항구(港口).

 

Singoara같이 사랑하는 이의

성한 피가 몹시는 먹고프다는 그 백랍 같은 여인도곤

아낙네와 발 벗은 어린 것이 더 안쓰러운 항구(港口).

 

오월 바람 설레는 항구(港口)에

멀리 떠난 너를 생각하는 눈시울이 뜨겁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호조일성(好鳥一聲)

 

 

갓 핀

청해(靑海)

성근 가지

일렁이는

향기에도

자칫

혈압(血壓)이

오른다.

 

어디서

찾아든

볼이 하이얀

멧새

그 목청

서럽도록

고아라.

 

봄 오자

산자락

흔들리는

아지랑이,

아지랑이 속에

청해(靑海)에

멧새 오가듯

살고 싶어라.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황(篁)

 

 

댓이파리

댓이파리

댓이파리에

바람이 왔다.

 

바람은

댓이파리보다

더 짙푸르다.

 

난 밋밋한 대와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태양(太陽)의 파란 분수(噴水)를

어린 금붕어 새끼처럼 뻐끔뻐끔

마시는 것이

좋다.

 

나는

갑자기 대가 되어버린다.

 

파란 대가 섞인

나는 나를 잊어버린 채

대랑 산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흑석(黑石)고개로 보내는 시(詩)

 

 

흑석고개는 어느 두메 산골인가

서울서도 한강

한강 건너 산을 넘어가야 한다던고

 

좀착한 키에

얼굴에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드러나는 네 이빨이

오늘은 선연히 뵈이는구나

 

눈 오는 겨울밤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아보리라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 1시집 『촛불』(1939)과, 8.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

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