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뱀이 부시시 눈을 떠보았다.
― 그러나 아직 겨울이었다.
하도 땅속이 훈훈해서 개구리도 뒷발을 쭈욱 펴보았다.
― 그러나 봄은 아니었다.
어디서 살얼음 풀린 물소리가 나서 나무움들도 살포시 밖을 내다보았다.
― 그러나 머언 산엔 눈이 하얗다.
핸 멀찌막히 `경칩(驚蟄)'을 세워 놓고 이렇게 따뜻하게 비췰 건 뭐람?
― 그러나 봄 머금은 햇볕이어서 좋다.
미치고 싶도록 햇볕이 다냥해서 나도 발을 쭈욱 펴고 눈을 떠본다.
― 그러나 `입춘(立春)'은 칼렌다 속에 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한대식물(寒帶植物)
푸른 계절이 모조리 휩쓸려가고 건강한 산맥들이 아주 물러앉은 뒤 세월은 오로지 슬픈 이야기만 싣고 장미처럼 받들던 네 심장을 사뭇 지나갔다
한사코 태양을 따라다니던 대낮도 인젠 싫다 푸른 하늘까지도 단숨에 삼키는 거룩한 밤을 가졌노라 한때 곤곤히 흐르던 난류가 멈춘 이후 네 심장에는 나날이 자라가는 한대식물이 무성하고나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항구(港口)에서
네가 떠난 항구(港口)에 오월 바람이 설렌다.
머리칼을 날리는 젊은 아낙네들은 베피떡이랑 뎀뿌라랑 소주병을 늘어놓고 뱃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꼬박꼬박 기두리고 있는 항구(港口).
가대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발 벗은 아이들은 구호양곡(救護糧穀)의 가마니에서 쑤시알갱이가 빠지면 병아리처럼 주워서는 차대기에 넣는 항구(港口).
Singoara같이 사랑하는 이의 성한 피가 몹시는 먹고프다는 그 백랍 같은 여인도곤 아낙네와 발 벗은 어린 것이 더 안쓰러운 항구(港口).
오월 바람 설레는 항구(港口)에 멀리 떠난 너를 생각하는 눈시울이 뜨겁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호조일성(好鳥一聲)
갓 핀 청해(靑海) 성근 가지 일렁이는 향기에도 자칫 혈압(血壓)이 오른다.
어디서 찾아든 볼이 하이얀 멧새 그 목청 서럽도록 고아라.
봄 오자 산자락 흔들리는 아지랑이, 아지랑이 속에 청해(靑海)에 멧새 오가듯 살고 싶어라.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황(篁)
댓이파리 댓이파리 댓이파리에 바람이 왔다.
바람은 댓이파리보다 더 짙푸르다.
난 밋밋한 대와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태양(太陽)의 파란 분수(噴水)를 어린 금붕어 새끼처럼 뻐끔뻐끔 마시는 것이 좋다.
나는 갑자기 대가 되어버린다.
파란 대가 섞인 나는 나를 잊어버린 채 대 대랑 산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흑석(黑石)고개로 보내는 시(詩)
흑석고개는 어느 두메 산골인가 서울서도 한강 한강 건너 산을 넘어가야 한다던고
좀착한 키에 얼굴에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드러나는 네 이빨이 오늘은 선연히 뵈이는구나
눈 오는 겨울밤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아보리라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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