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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곡(哭) 촉석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1.

노천명 시인 / 곡(哭) 촉석루

 

 

논개 치마에 불이 붙어

논개 치맛자락에 불이 붙어

 

논개는 남강 비탈 위에 서서

화신(火神)처럼 무서웠더란다

 

`우짝고 오매야! 촉석루가 탄다, 촉석루가'

마지막 지붕이 무너질 제는

기왓장 내려앉는 소리

온 진주가 진동을 했더란다

 

기왓장만 내려앉은 게 아니요

고을 사람들의 넋이 내려앉았기에

`비봉산(飛鳳山) 서장대(西將台)'가 몸부림을 치더란다

 

조용히 살아가던 조그마한 마을에

이 어쩐 참혹한 재앙이었나뇨

 

밀어붙인 환한 벌판은

일찍이 우리의 낯익은 상점들이 있던 곳

 

할매 때부터 정이 든 우리들의 집이 서 있던 자리

문둥이가 우는 밤

진주사 더 섧게 통곡하는 것을

진주사 더 섧게 두견모양 목메이는 것을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교정

 

 

흰 양옥이 푸른 나무들 속에

진주처럼 빛나는 오후―

닥터 노엘의 조울리는 강의를 듣기보다 젊은 학생들은

건너편 포푸라나무 위로 드높이 날리는 깃발 보기를 더 좋아했다

 

향수가 물이랑처럼 꿈틀거린다

퍼덕이는 깃발에 이국 정경이 아롱진다

지향 없는 곳을 마음은 더듬었다

 

낯선 거리에서 금발의 처녀를 만났다

깊숙히 들어간 정열적인 그 눈이

이국 소녀를 응시하면

`형제여!'

은근히 뜨거운 손을 내밀리라

 

푸른 포푸라나무!

흰 양옥!

붉은 깃발!

내 제복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 정경이여……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귀뚜라미

 

 

몸 둔 곳 알려서는 드을 좋아―

이런 모양 보여서도 안 되는 까닭에

숨어서 기나긴 밤 울어 새웁니다

 

밤이면 나와 함께 우는 이도 있어

달이 밝으면 더 깊이 숨겨 둡니다

오늘도 저 섬돌 뒤

내 슬픈 밤을 지켜야 합니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