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곡(哭) 촉석루
논개 치마에 불이 붙어 논개 치맛자락에 불이 붙어
논개는 남강 비탈 위에 서서 화신(火神)처럼 무서웠더란다
`우짝고 오매야! 촉석루가 탄다, 촉석루가' 마지막 지붕이 무너질 제는 기왓장 내려앉는 소리 온 진주가 진동을 했더란다
기왓장만 내려앉은 게 아니요 고을 사람들의 넋이 내려앉았기에 `비봉산(飛鳳山) 서장대(西將台)'가 몸부림을 치더란다
조용히 살아가던 조그마한 마을에 이 어쩐 참혹한 재앙이었나뇨
밀어붙인 환한 벌판은 일찍이 우리의 낯익은 상점들이 있던 곳
할매 때부터 정이 든 우리들의 집이 서 있던 자리 문둥이가 우는 밤 진주사 더 섧게 통곡하는 것을 진주사 더 섧게 두견모양 목메이는 것을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교정
흰 양옥이 푸른 나무들 속에 진주처럼 빛나는 오후― 닥터 노엘의 조울리는 강의를 듣기보다 젊은 학생들은 건너편 포푸라나무 위로 드높이 날리는 깃발 보기를 더 좋아했다
향수가 물이랑처럼 꿈틀거린다 퍼덕이는 깃발에 이국 정경이 아롱진다 지향 없는 곳을 마음은 더듬었다
낯선 거리에서 금발의 처녀를 만났다 깊숙히 들어간 정열적인 그 눈이 이국 소녀를 응시하면 `형제여!' 은근히 뜨거운 손을 내밀리라
푸른 포푸라나무! 흰 양옥! 붉은 깃발! 내 제복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 정경이여……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귀뚜라미
몸 둔 곳 알려서는 드을 좋아― 이런 모양 보여서도 안 되는 까닭에 숨어서 기나긴 밤 울어 새웁니다
밤이면 나와 함께 우는 이도 있어 달이 밝으면 더 깊이 숨겨 둡니다 오늘도 저 섬돌 뒤 내 슬픈 밤을 지켜야 합니다
산호림, 자가본,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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